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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Oct 30. 2020

보랏빛 드레스



달라붙지 않는 청바지, 조금 넉넉한 핏의 티셔츠, 그리고 운동화. 내가 평소에 입고 다니던 옷들이었다.

간밤에 먹고 잔 야식 때문에 볼록 나와있는 배를 억지로 숨길 필요가 없는 미디엄 사이즈의 티셔츠. 오랜 시간 앉아서, 혹은 서서 작업을 해야 할 때 전혀 불편함이 없을 운동화. 집 앞을 잠깐 나가더라도 운동복을 대충 걸쳐 입고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 유일하게 편한 옷은 청바지였다. 그것도 보이프랜드 진 같이 살짝 헐렁한 걸로.


너와 일상적인 데이트를 할 때도, 작업을 할 때도 우리는 늘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즐겼고 그게 편했다.





"뭐야, 누구 보여주려고 그렇게 파인 옷을 입고 나왔어? 좀 가려, 딴 남자들이 보기 전에."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부터 쓰고 눈으로 흘긋, 내 옷차림을 보더니 인사 대신 쏘아붙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내가 무엇을 입었는지 하나하나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는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골이 드러나지 않는, 적당히 파인 여름 원피스. 소매는 짧은 반팔로 팔뚝을 덮었고 치마 길이는 무릎 언저리, 까만 단화를 신었다. 뭐가 문제인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나는 다시 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와, 오늘 무슨 날이야?" 



전시가 있던 날이었다. 계속 서 있어야 할 테니 편한 신발을 신을까 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짙은 보라색의 어깨가 드러난 미니 드레스를 입었고 매일 높게 올려 돌돌 말아 묶고 다녔던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신을까 말까 한 하이힐을 신었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만날 테니, 평소와 다름없는 옷차림으로는 조금 재미없지 않을까 했던 생각이었는데, 역시나 평소에 입던 옷차림이 아니다 보니 괜히 어색해서 현관문을 나올 때부터 '다시 돌아가서 갈아입고 올까?'를 수백 번 생각했다. 높은 힐에 걸음은 느려졌고 배에 힘주고 걷느라 뭔가 뽐내는 듯한 걸음걸이였지만 널 만날 시간이 촉박해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이내 길 모퉁이에 서있는 너를 발견하고 나는 왠지 민망해서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너는 너무나 황홀한 얼굴로 눈이 평소보다 조금 커진 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



"아니, 전혀! 너무 아름다워."



너는 환하게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싼 채 내 속도에 맞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해. 봐봐 지나가는 남자들이 널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어."



"그게 불편하지 않아?"



"이게 왜 불편해?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의 남자 친구라니... 나는 그게 지금 더 믿기 힘든데?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네 옆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어서 오히려 난 좋아.


나 같은 사람의 여자 친구여서 고마워, 네가."




뒤꿈치가 까지는 게 빠를까 발톱이 나가는 게 빠를까 생각하며 걸었던 내 발들은 너의 말에 푹신한 깃털 신발이라도 신은 듯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고, 쇼윈도에 비치던 낯설기만 했던 내 모습도 너의 말에 왠지 모르게 정말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인 것만 같았다. 허리에 감긴 너의 팔을 잡아 빼 팔짱을 끼고 손을 잡았다. 흘끔흘끔 바라보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느끼면서 나는 너를 살짝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어버렸다. 같은 웃음으로 답하는 너를 바라보며 얼굴은 여전히 쑥스러움에 상기된 채 속삭였다. 네가 귀를 기울이려 다가오는 숨결이 느껴졌다. 


"고마워, 나 같은 사람 곁에 있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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