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충한 날

by 은쨩

날씨요정, 난 이 단어가 참 마음에 든다.

그 사람이 있는 곳에는 날씨가 좋다는 의미인데 어찌 이렇게 귀엽게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가끔씩 한국인의 센스에 놀라곤 한다. 여하튼 난 스스로 '날씨요정 레벨 1'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여행을 할 때면 열에 아홉은 날씨가 좋다. 나의 설레는 마음과 하찮은 기도가 통한 걸까.


날씨가 사람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날의 온도와 햇빛의 따스함이 우리의 감정을 마구 흔들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일로 기분이 울적한 날, 하늘까지 흐리면 괜스레 그 감정에 깊숙이 젖게 된다. 혹은 약하게 내리는 비의 토독-거리는 소리와 그 빗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외로운 나를 위로할 수도 있다. 강하게 내리는 비는 나의 고3 시절 생일을 생각나게 한다. 독서실을 박차고 나와 거센 비를 맞으며 펑펑 울던 그날. 그래서 날씨란 참 신기하다. 그렇기에 우중충하고 흐린 날에 아름다운 기억만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뉴질랜드는 하루에 사계절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변덕스럽다. 아침에 비가 거세게 내리다가도 몇 시간 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하고 밤이 되면 다시 비가 내린다. 길을 걷다가 하늘을 보면 눈앞의 하늘은 맑아서 뜨거운 햇빛으로 고생을 해야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회색빛 하늘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덮여있다. 이곳의 이러한 변동성은 남태평양의 위치적인 특성과 해양성 기후, 그리고 작지만 많은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뉴질랜드의 날씨 때문에 나의 날씨요정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흐린 날이라도 좋은 점이 있다. 그건 바로 길에 피어난 다양한 꽃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거다. 맑은 날의 화창한 하늘을 보며 아늑한 햇빛을 느끼느라 놓치는 것들을, 흐린 날엔 더욱 느낄 수 있다. 이런 흐린 날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이런 하늘 아래에서 잘 살고 있어, 내 걱정은 마'라며 보여주고 싶다. 어떤 날이든 하늘이든, 상관없이 잘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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