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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그렇게 나의 마음에 들어왔다

by 애니마리아

"엄마, 나 살아 있어요. 걱정 마세요."

"하아, 그래. 그런 것 같네. 잘 살아 있구나. 밤새 별일 없었고?"

"네, 엄마 미안하지만 바로 근무 가야 해요."

"아, 그래, 수고해."


군대 간 아이가 평일 전화를 걸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첫눈이 폭설로 내리던 날 걱정하며 괜찮은지 물은 아이. 그리고 얼마 전 뜬금없이 계엄령이 대한민국을 흔든 다음 날 울린 아들의 전화. 전화를 받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생존이라는 말을 건넨 아이의 말에 당혹스러우면서도 이내 긴장이 풀리며 안심이 되었다. 1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통화, 멍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던 기억이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나라를 휩쓸고 간 황당한 사건으로 우리나라는 생각지도 못한 몸살을 앓고 있다.


생각해 보면 전화를 끊고 나서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못해 아쉬웠다. 이럴 때면 내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릴 때마다 왜 그렇게 고맙다는 말로 마무리하시는지 이해가 간다. 정말 괜찮은지 진실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아이가 그저 잘 있다는 말,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주는 힘은 크다. 아이의 독립 여부와 상관없이 관계를 오래 이어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기도 할 터이다. 그 너머에는 어떤 고난과 불안이 있을지라도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기억해 주는 마음,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그 마음에 감사한 것이다.


다른 동물도 부모를 생각할까? 동물도 새끼를 생각할 것이다. 서로 그리워할 것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서로를 기억하고 보듬을 방법이 없다. 흔적을 남기는 거서도 아니고. 전화가, 문명이, 단 하룻밤의 난리지만 인간의 정과 관계, 소중한 존재를 느낀다.


뉴스에서 누가 옳고 그르고 보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큰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잘 해결해 나가려는 행위 자체에 감사하다. 이런 작은 재채기에 기침에도 마음일 벌렁거리는데, 전쟁이 일어나는 우크라이나, 가자 지구, 알지 못하는 투쟁의 나라에서의 삶은 얼마나 버거울 것인가.

옳고 그름을 확실히 판단하기가 녹록지 않을 때가 있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노출되는 언론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군중심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전문가가 아니니 정치는 모르겠으나 극한의 상황에 빠진 인간은 신분을 막론하고 두려움과 갈등에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국회에 들어선 군인들은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다. '기자를 밀치다가 총의 부분에 부딪치자 군인이 그 기자에게 괜찮냐고 묻고, 해제된 후에는 출구를 안내하는 직원에게 감사의 경례를 하고 갔다는 기사'(경향신문 2024년 12월 4일 <기자도 강제로 끌어낸 계엄군... 간발 차 국회 의결 뒤엔 '감사'> 문광호 기자, 이유진 기자)를 보았다. 그들도 안심했을 것이다. 명령에 따라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되지 않았음을. 양심과 의무 속에 빠른 판단을 해야 했던, 혼란에 힘들어했을 사람들이 있었다. 직접적인 대상은 아니었지만 관계와 연결의 고리를 타고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에 충격과 여파가 스며들고 말았다. 행동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또 하나의 사건을 맞이하고 말았다.


계엄령이 발효되던 6시간 정치적 발언, 이에 대한 이런저런 언급을 한 사이트가 거의 마비되었다고 한다. 언론 통제 때문이라고. 관계는 어렵다. 개인, 당, 국가, 사회 간에 의견이 정말 다르다. 제대로 된 판단이 불가할 정도로, 피곤할 정도로 정보가 넘쳐나고 모든 기사가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폭력과 강압이 아닌 조화의 방법을 찾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때로는 결단이 필요할 때도 있을 테지만 정답은 알 수 없다. 서로 자신이 정답이라고 하는 모습에 더욱 모르겠다.


그저 누군가를 억압하고 내 뜻대로 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하고 노력하기에도 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아이의 전화, 아이의 말이 내 마음속에 쿵 하고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진 날, 일상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 본다. 국방력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생명을 지킬 때만 사용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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