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by 애니마리아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이탁오가 말한 "師友 사우"는 스승 같은 벗이 아니면 벗이 아니고, 벗 같은 스승이 아니면 스승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나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로, 우리는 서로 스승이자 벗이었습니다.

『너를 아끼며 살아라』197쪽 중에서




나태주 시인은 책에서 '사우(師友)'를 인용하며 나이가 들수록 이런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지만 그동안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이 글의 핵심은 '스승 같은 벗, 벗 같은 스승'이다.



벗을 만나도 스승과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친구의 훌륭한 인품을 느끼고 능력을 지켜보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테니까. 함께 밥을 먹고 같이 놀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좋은 친구, 본받을 만한 친구에 어울리도록 스스로 노력하다 보면 그 친구 또한 내게 배우려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나의 장점을 봐주고 감탄하며 격려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벗의 선행, 벗의 노력, 벗의 겸손, 벗의 자상함, 벗의 배려, 벗의 열정을 보며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스승은 어떠한가. 우리는 대부분 학교를 다니며 많은 선생님을 만난다. 정규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도 사회에서 직장의 선배나 사수를, 강좌의 강연자, 강사를 만난다. 나보다 한 발, 한 시기 앞서 길을 개척하고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권위의 대상이다. 경외하되 다가가기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분이 벗과 같이 나를 대한다면? 겸손한 태도로 친근하게 나를 대하고 내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인내와 이해로 경청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제자로서 하나를 배우더라도 더 깊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를 배우려다 둘, 셋 더 배우고 싶을 것이고 더 큰 목표를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관계가 비단 스승과 벗에만 해당할까. 직접적인 접촉이 없어도, 심지어 다른 시대, 다른 나라처럼 먼 곳에 있어도 스승을 만나도 벗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작품에 빠져들어갈수록 작가가 궁금해지고 삶의 지혜와 통찰을 담기 위해 애쓴 배경이 궁금해진다. 관심이 생기고 커지면 단 한 줄을 읽더라도 생각하게 되고 배우게 되며 돌아보게 된다. 최근에만 해도 고명환 작가의 책에서 멈추었고 나태주 시인의 시에서 웃었으며 김상욱 과학자의 책에서 배웠다. 책이 소설과 같은 문학이어도 논픽션이어도 배움과 깨달음은 드러난다. 내가 그 책을 읽을 때 진심으로 대한다면. 열린 마음으로 만난다면.



오늘 나는 스쳐가는 이웃이나 낯선 사람을 통해서도 스승을 만나고 벗의 정을 느낀다. 밤새 근무를 하고도 내가 아파트 주민인 것을 확인하고 애써 눈을 맞추며 먼저 밝게 인사하시는 경비원 선생님께는 프로 정신과 겸손, 성실한 가장의 모습을 배운다. 길을 다 가보면 반려견과 산책을 하는 특정인을 볼 때가 있다. 종종 목격하지만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다. 좁은 길에서 마주쳐 지나갈 때면 혹시 내가 불편해하거나 개를 무서워할까 봐 먼저 멈추어 개를 진정시키시는 분이 있다. 낯선 이웃이지만 그분에게서 따뜻한 배려를 감지한다.



SNS에서만 교류하는 온라인 이웃이나 글벗이지만 가끔 배려와 공감의 멘트로 소통을 하는 분을 만날 때가 있다. 열정이 금방 사라지질 법도 한데 꾸준히 서로의 관심사를 응원하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저 '좋아요'의 개수만 채우거나 광고의 효과만을 취하려는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감지된다. 솔직히 나도 매번 그분들의 글을 다 꼼꼼히 읽지는 못한다. 다른 일이나 우선순위를 하다가 시간이 휙 지나가기도 하니까. 그래도 이름이나 아이디, 핵심 내용 등 상황에 따라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진정성과 꾸준함이 있다고 판단되면 상대의 결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찾아 한 마디라도 남기려 한다. 때로는 마음속으로 때로는 비밀글로,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면 잠시 상상 속의 만남에서 대화를 이어가기도 한다.



클릭 한 번은 찰나일지 모르나 열 번, 스무 번, 오십 번을 하면 그에 들이는 시간도 엄청나다. 그 귀한 시간을 들여 클릭을 받으니, 나 또한 배움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좋은 글은 좋은 글대로, 다소 실망스러운 내용은 그대로 내게는 교훈이 된다. 타산지석은 모든 것에 배움이 가능함을 말해주는 진리니까. 답글이나 답방이 없는가? 이제는 그래도 괜찮다. 그분의 글을 읽고 마음의 양식을 조금이나마 쌓지 않았는가. 읽고 생각까지 했다면 그 나름대로 나의 독서력과 글쓰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눈을 돌려 나의 가족을 돌아본다. 가까운 사이지만 정작 내게 가까운 사람의 진면목을 못 보거나 당연하게 지나치기 쉬우니 말이다. 세상의 풍파에 나와 달리 의젓하고 성숙하게 대하는 남편을 보니 존경스럽다. 미래가 불안하고 현재도 힘들 텐데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며 밝은 모습을 잃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태도에 감사하고 또 위로를 받는다. 약해지는 나의 모습을 추스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더 좋은 아내, 더 포근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단기간이어도 괜찮다. 잠시라도 내게 스승이 되어주고 벗과 같은 행복을 선사한 그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스승은 아니더라도 벗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나는 열망한다. 새로운 소망을, 똑같은 희망을. 나는 늘 부족하다는 마음이어선지 나의 글은 자주 '하고 싶다'로 끝난다. 아마 미래의 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민망하지만 괜찮다. 뭔가를 하고 싶어야 배울 수 있고 더 나은 벗이 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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