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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 Apr 27. 2024

이혼일기(62)

회식가방

4월은 정말 잔인한 달,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층 따뜻해진 날씨에 비해 내 마음과 상황은 너무 그러지 못한데,

회식이 3주간 7번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린 진정 잔인한 달. -_-

; 저희 부서는 규모가 꽤 커서 이렇게 회식을 해도 참석인원이 전혀 겹치지 않아요. 거의 저만 매번 참석이지 다른 멤버는 늘 바뀌는 꼭 필요한 공식적인 회식이에요. ^-^;;

그래도.... 와....C.

회식 일정이 이렇게 있고, 의미가 있는 회식이니 되도록 꼭 참여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너 나 무시하냐 응 나 부모도 없고 남편도 없다고 응 나 무시하는 거지. 나 다음 주에 조정하러 법원도 가야하는데 응 나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응 

통보 해주는 직원의 멱살을 잡는 상상을 하며, 말도 안되는 반항을, 머릿속으로만 해본다.

아무도 내 사정을 모른다. 회사에 이야기할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너 건너 소식을 들었을 사람은 있을 법해도, 티 내는 걸 나도 그들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관사에 아이를 데리고 와서 혼자 챙기며, 안고 등원시키고 출근하고, 하원하는 것은 다들 보아 알고 있는데... 최근 회식 몇번을 아이 데리고 가봤더니 다들 으레히 그러려니 생각을 한다. 어찌보면 회사사람들 입장에선 내가 아이를 데려와도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 이기도 하니 불만을 가질 일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디테일이 떨어진다. 아이키우는 엄마는 집에 빨리 보내주는 것이 최고의 배려인데, 종종 어떤 직원은 내 육아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겠다는 이유로, 또 아이가 엄마와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냐며 아이와 함께 하는 식사자리를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아이고.. 되다. 정말 되다.. 하면서도 아이를 데리고 그 자리마다 나갔던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상태까지 고려해서 나의 필요에 맞는 배려를 하면 더없이 좋겠지만, 인간세상에 더없이 좋은 것이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어차피 완벽하게 좋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호의가 오히려 날 어렵게 한다고 해도, 그 호의 하나만으로도 기쁘게 받아들일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결혼 후 첫 아버님 제사는, 참 힘이 들었다. 첫 제사고, 나는 소득도 기대도 없는 며느리이니까 노력봉사하는 것이 맞기도 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없으면 어머님 이모님 두분이 하셨을 일인데, 내가 한 명 더 들어가서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일이었다.

 결혼 당시 이론 저런 사정으로 교회는 녔지만, 어릴 적부터 가져온 신앙이 있었던 터라 제사의 의미에 동의하지는 못해도, 이 집안 식구들 나름대로 고인을 기리는 방식이라면 기꺼이 함께할 용의가 있었다. 제사와 차례가 아버님께 일년에 몇번 식사를 차려올리는 의미라 생각하면 오히려 기쁘게 할 수 있었다.

하자만 내내 우리 아들은 공부를 해야해서, 우리 아들은 바쁘니까. 놀고 있는 아들한테 어처구니 없는 합리화 프레임을 씌우는 것도 듣기가 힘들고,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는 것도 유쾌하지 않았다. 하긴 어머님이니까 그런 것들이 그렇다 쳐도, 무엇보다 아내가 땀흘리며 애쓰는 데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는 표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행여나 내가 불만이라도 가질새라 감시하듯 지켜보며 사사건건 통제하려고 드는 남편이 싫었고. 그러다 소파에 대자로 누워 자고 있는 모습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가지들이 거슬리고 힘이 들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제사를 마치고, 시누이네는 어머님이 얼른 들어가라고 쫓아보내니 정리까지 내 몫이 되어  제기정리를 마치고 자정이 훨씬 넘어 풀려나왔다.

어깨도 머리도 몸 전체가 쑤시지만 혹시나 생색낸다고 고깝게 생각할까봐 별 말 하지 않고,  빨리 가서 자자... 마음먹고 있는데, 남편이 내가 오늘 수고를 했으니 상을 주겠다고 한다.

상으로 심야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

내 의향을 묻는 것이 아니다. 보러가겠다며 집으로 가던 차를 돌렸고,

영화는 나는 관심도 없는 본인이 좋아하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아니 이건 아니라고 반발도 하기 전에 어디로 전화를 건다.

어머니!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하셨는데 저희랑 영화보러 가세요!

........ 이 정도면, 호의를 보여주었다고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인간의 말과 행동은 빙산의 일각이지. 그러고보니 넌 별 고생을 안해서 아픈 데도 없겠구나.. 근데, 그래도 날 하루 종일 옆에서 봤는데.. 니가 아니라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럴 수는 없을 텐데.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거대한 빙하 덩어리에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다. 내 작은 곡괭이로는 흠집도 안 갈 것 같은데.

 됐으니 너희나 보러가라는 모자간의 다정한 대화를 들으며 망연자실 한데, 전화기가 나한테까지 넘어왔다

 우리 ㅇㅇ이가 이렇게 다정해서 이 밤중에도 힘들텐데 자기 마누라 영화를 보여준다고 하는 구나.

얘 재밌게 보고 와라. 
.

.

.


...... 왜 그 때 아무 말도 못해놓고 이제 와서 억울할까. 나도 참 속도 좁고 멍청하다. 왜 그 때 일이 이제까지 이렇게 생생하게 생각이 날까.

새벽부터 중얼거리며 회식을 가기 위한 준비를 주섬주섬 한다.

회식 가는 날에는 가방이 네개.

하나는, 스케치북과 색연필 싸인펜, 색종이. 가위 풀 스티커 잔뜩. 그리고 최후의 보루로 헤드셋. 이도 저도 안되면 영상이라도 보여줘야 한다.

두번째는, 아이용 도시락. 회식 장소에 가서 아이 것을 따로 시키기도 번거롭고 뭐가 있는 지 알 수도 없어서 과일과 브로콜리, 새우 등등등을 넣어 싸고 또 최후의 수단으로 마이쮸나 새콤달콤같은 평소에 잘 주지 않는 주전부리도 넣는다. 집에 가자고 할 때마다 하나 언제 가냐고 속삭이면 또 하나. 아마 치트키를 하나씩 쓰다보면 돌어올 시간이 되겠지.

 그리고 세번째내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마지막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을 또 메고. 잠이 덜깬 아이를 안고.

 오늘도 즐겁지는 않지만, 기운을 내어 출근하는 길.

이것으로 충분하다.

아이와 볼을 부비며 일하러 갈 수 있고,
내가 아이를 찾아 돌아올 수 있으니.

할 수 없는 것에 비하면, 하기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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