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_강의 유혹에 빠지다

어느 이른봄 섬진강자전거길이야기 끝

by 은륜



꽃 길이다.

매화마을에 꽃이 올라왔다.

우리는 이 꽃도 못 먹고 달려만 간다. 강가의 철 지난 갈대 밭도 객지 손님 불쌍하다며 혀를 찬다. 안장에 올라타 달리고 또 달려도 섬진강은 도도하게 움직이지 않고 큰 그림이 되어 나보란 듯이 굳건하다. 지리산을 등에 기댄 강은 신선처럼 나를 내려다본다. 섬진강 물색은 기를 쓰고 달려가는 이방인에게 기세 등등한 푸른빛으로 흘러들어온다.


멋지게 속도를 내며 달려가지만 나는 한 점 꽃도 되지 못했다.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를 울부짖게 만들어 왜구를 광양으로 몰아냈던 강이 아닌가. 그때 얻은 섬(蟾:두꺼비) 자로 蟾津江이라 불린다. 모래 가람이란 별명만큼 아름답고 고운 백사장은 사파이어를 둘러싸는 금가락지 같다. 섬진강이 품은 마을은 강을 그들만의 이름으로 사랑했다. 남원은 '순자강(鶉子江)', 곡성은 '압록강(鴨綠江)', 구례는 '잔수강(潺水江)' 광양은 '섬진강(蟾津江)' 혹은 섬강(蟾江)으로 강을 불렀다.


화창한 햇살은 어제 내어주지 않던 미소를 마음껏 강물 위로 뿌려준다.



강이 유혹한다.


바람은 진하게 싸움을 건다.


이제 광양만으로 올라온 짠 냄새가 강바람쯤 우습다고 내 가슴을 밀어댄다. 허벅지 근육을 아무리 쥐어짜도 바퀴는 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광양터미널은 어디쯤인지 짐작도 못하겠다. 섬진강 자전거길의 마지막인증센터가 있는 배알도 수면 공원을 멀리 두고 헤매고 있다. 눈물이 난다. 무릎이 터질 것 같다.


뒤에서 그가 소리친다.

"STOP! 돌아가야 될 것 같아!"


이런, 왜 너는 내가 기를 쓰고 있을 때마다 돌아가자고 하는 거야!! 뒤쫓아와서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며 지도를 들이대는 그에게 나는 분명 이정표를 봤다고 우겼다. 가정불화의 현장을 딱 맞춰 지나가는 다른 선수들에게 구원 요청을 한다. 늘 낯선 길에서 길을 묻는 역할은 나다. 라이더 한 분, 친절한 인도자를 자원한다.


광양만을 끼고 낯선 이와 짧은 라이딩을 함께 한다.


이제 광양시로 가는 자동차 전용 도로로 들어섰다. 오르막의 무게를 견디며 자동차들의 위협에도 꿋꿋하게 마지막 길을 마쳤다. 버스 출발 시간 10 분 전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와 나는 따로 앉았다.


마음이 육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시간에는 각자의 공간이 필요하다.


내가 샌드위치를 사는 5분 동안 남편과 버스 기사는 나를 찾아다녔다지만 덕분에 우리는 배를 채우고 탈진을 면했다. 몸속으로 샌드위치를 욱여넣는 동안 창 밖에는 해가 지고 있다. 우리가 이틀 동안 달려온 길을 버스는 4시간 안에 도착할 예정이다. 우리는 왜 달려왔는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힘 빠진 몸이 질문한다.


짐칸에서 자전거를 내리던 남편의 몸이 휘청거린다. 이런 모습 처음이다.


오늘 밤 도시의 불빛이 낯설다. 지하철 안에서 마주하는 표정들은 무미하다.


집에 들어와 자전거와 짐을 정리를 하고 씻고 누웠다. 섬진강 물결이 감은 두 눈 사이로 흘러가고 눈바람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쉽게 잠이 올 몸이 아니다. 부엌 찬장 한 구석에 잠자던 진한 독주를 찾아 한 잔을 따랐다. 단숨에 털어 넣고 다시 눕는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근육통이 가슴속 열기와 만난다.


"두 번은 안 할 테야."

아내의 혼잣말에 남편은 잠꼬대하듯 중얼거린다.

"아니지, 미친 짓 그대로 미국 횡단 가야지."



그날 밤 철없는 중년부부는 꿈속을 달리며 강이 되고 산이 되었다.



#19_어느 이른 봄 섬진강자전거길이야기 끝
다음화 #20_어느 가을 동해안자전거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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