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른봄 섬진강자전거길이야기 다섯
근사한 이름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곡성군 그랑프리 모텔에서 1 박 했다는 라이더의 블로그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4층이라는 이야기는 없었단다. 미안한 남편이 자전거 두 대를 혼자서 옮기겠다며 4층을 3번 왕복했다. 동네 목욕탕을 함께 운영하는이 시골 여관 욕실에 알*랑 비누와 치약 튜브 하나가 누군가의 흔적을 남기고 놓여 있다. 우리에게는 수건 2장과 한 번 쓰면 휘어질듯한 칫솔이 지급되었다.
"그래, 지금 우리는 등 대고 다리 뻗고 누워 이불 덮고따뜻하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욕조가 없는 욕실에 모래와 얼음으로 뒤범벅된 자전거들을 세워 놓고 바라본다. 기특하고 장하다, 나의 애마여. 남편은 호텔방에 들어오면 늘 하던 대로 가방에서 모든 물건을 꺼내 이 곳 저곳에 흩어놓고 우왕좌왕한다. 지금 나에게는 잔소리 한마디의 힘도 남아있지 않다. LPGA 언니들이 애용한다는 파스를 온몸에 바르는 거사를 치렀다. 내일은 100km를 달려야 한다. 오늘 밤에는 코 골아도 서로 용서해주기로 했다.
화려한 60km를 달려왔다. 긴 하루였다.
삼일절 아침, 어둡고 무지했던 어제 길들은 사라졌다.
하늘은 화창하고 여전히 차갑지만 다른 날이다.
"눈보라 라이딩은 아름다웠어. 하지만 두 번은 안 할 거야." 시골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빈 속을 채우며 말했다. "미친 거지, 우리가." 또 미친 짓으로 우리는 동지가 되었다. 이십 년 넘게 작당을 해 온 커플이 낯선 곳에서 새 아침을 맞으며 하는 소리라니. 강물 위로 커다란 날개를 가득 펼치고 아침 햇살을 누리던 새보다 자전거길 위에 출정한 라이더들이 더 반갑고 신기하다.
이제 우리는 외롭지 않은 길을 간다. 곡성에서 구례까지 30km. 강 여울을 가로지르는 곳에서 조선시대 묵객들이 놀았다는 횡탄정(橫灘亭)을 지난다. 강을 끼고 자란 마을들은 사연도 많다. 달려가는 우리 옆으로 마을의 개들이 사납게 쫓아온다. 개 보다 빨리 달려 망신을 개 몫으로 돌려준다. 허기가 몰려와 허벅지에 힘이 빠질 때 즈음 첫 봄 꽃을 보았다. 길 가의 작은 매실나무가 잔설 위에서 소박한 미소를 보낸다. 구례역에 도착하기 직전 세 번째 전라도 밥상 앞에 앉았다. 강굴 젓이 달다.
길이 아름다워도 힘들면 달릴 수 없다.
100km 넘는 라이딩에서 체력을 안배하지 못하면 천 만원 짜리 자전거도 무용지물이다. 적절한 시간에 영양과 휴식을 채워야 번 아웃을 면한다. 겨우내 체력 단련하며 기다렸다. 맛있는 전라도 음식으로 원기도 보충했다. 어제 눈보라 속에서 칼을 간 선수들이 자전거 길에 속속 등장한다. 시속 30km로 높여 달려본다.
구례역을 지나 사성암인증센터부터 남도대교까지 20km를 쉬지 않고 달렸다.
강 건너는 화개장터다. 전남과 경남의 경계는 지리산 위를 지나며 섬진강은 경남 하동군과 전남 광양시의 경계가 된다. 윗마을 구례 사람들은 화개장터에 갈 때 남도대교를 건넌다. 섬진강은 오롯이 전라의 땅에서 발원하여 깊은 골짜기의 경계를 누르고 자신의 삶을 끝나는 때에야 지리산에 한 곁을 내어준다.
산의 기세는 거칠고 높다 다시 낮아지고 강의 가슴은 바다를 향하며 깊고 푸르다 넓어진다.
다른 방언을 들으러 나아가기에 거리는 멀기만 하다.
#18_어느 이른 봄 섬진강자전거길이야기 다섯 끝
다음화 #19_강의 유혹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