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에 최소한 이 조항은 넣어라
선배, 법무팀이라고 하는 단어는 일단 짜증 나고 멀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너도 법무팀이거든."
-AM 10:13
영업부서에서 고충을 토로할 때가 있습니다. 법무팀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다, 오로지 돈만 써대면서(Cost center) 일을 느리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이런 게 주된 논지입니다. 그분들 입장에선 당연합니다. 윗분들은 빨리빨리 기안 올리라고 핏대부터 세우는데, 거 변호사라는 놈이 계약서 다시 써라, 무슨무슨 조항을 넣어라, 프로젝트가 애초에 법률에 저촉된다 그만둬라 등등 간섭해대면 급한 마음에 짜증이 나는 것도 다반사일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법무팀의 숙명과도 같은 일입니다. 오해를 사는 건 필연입니다. 법무팀, 특히 그 안에서 일하는 사내변호사의 본질적인 역할은 회사를 둘러싼 위험을 관리, 즉 될 수 있는 한 최소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막상 상대하는 입장에서 보면 잘 봐줘야 리스크 관리고 그냥 보면 지적질이 따로 없겠지요. 그러나 법무팀이 계속 그렇게 의견을 내는 건 어디까지나 회사의 영업활동이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지, 사업을 방해하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물론 이상한 놈들도 존재하겠죠, 네 압니다). 법무팀은 그놈의 지적질을 한다고 따로 얻는 게 없다는 걸 아신다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리스크에 대한 코멘트를 한번이라도 했다면 만약 일이 잘못됐을 경우 엿먹는 건 실무진이지 법무팀이 아니라는 점도 참고).
예를 들어 볼까요. 사내변호사의 일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라 볼 수 있는 계약서 검토 업무(대부분의 사내변호사들은 이 업무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겠지요)만 해도, 현업 부서에서 바로 온 계약서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얼핏 멀쩡해 보여도 뜯어고칠 부분은 항상 한가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이 성취되면 이쪽만 일방적으로 위약금을 내게 된다든지, 비밀유지 조항에서 우리 쪽 비밀정보 범위는 엄청 좁은데 저쪽은 엄청 넓은 데다 자회사 공유까지 가능하다든지 하는, 유불리가 뚜렷한 조항들이 눈에 보이는데 이런 것들을 고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건 실무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이를 구분할 법률지식이 없는 이상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상당수 법무팀이 실무진에게 체크리스트를 배포하기도 합니다. 가뜩이나 많은 일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의 양식 있는 실무진은 열심히 배우고, 이를 받아들여 계약서를 열심히 고쳐 옵니다. 그럼 법무팀은 떙큐x100 상태로 받아 들고, 오고 가는 말이 고와집니다.
문제는 그래도 안 고쳐오는 경우. 그때부터는 전쟁이죠. 저능아들과 프로불편맨들의 수준 낮고 치졸하면서 더티한 진흙탕 싸움. 왜 줬는데 준대로 검토 안 하시냐, 준대로 했다, 뭐야 근데 하나도 안 고쳐져 있잖아요, 아 법무팀이 그럼 직접 협의해 XX 바로 계약서 넘겨줄게, 아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협의는 님들이 해야죠 그럼 우리 의견 달아서 법무팀은 이렇게 얘기했으나 우리는 꼴리는 대로 하겠다 하고 적어서 기안 올리시든가!!
근데 더 힘 빠지는 건 이거 이겨봤자 얻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거. 정말 부질없는 시간낭비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실무부서에서 해주셔야 할 최소한의 검토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완전 쉬워요.
-문서의 성질은 제목이 아니라 내용이 결정함.
-심지어 법인이 아니라 개인사업자인 경우도 있음.
-분쟁가능성을 스스로 만드는 일. 나중에 싸우자는 말과 동일.
-껄끄러운 계약은 합의를 통해 연장하도록, 내게 유리한 계약은 이의없을 경우 자동 연장되도록 하자.
-책임소재가 명확한 계약의 경우 위약벌 조항도 고려할 것.
-5~6% 이자만 받아도 상관없다면 넣지 않아도 무방.
-계약 당사자가 갑자기 다른 기업으로 바뀐다거나, 구두로 얘기한 그때 그 조항 있었지 않느냐며 담당자가 엉겨붙거나, 조항 하나가 무효가 됐다고 계약 전부 무효라고 떼를 쓰거나, 계약과 다른 관행이 형성됐다며 본래 계약조항을 잊어버린 것처럼 구는 회사를 만나보면 다음부터 꼭 넣게 될 조항들임.
-멕시코에 가서 소송에 대응해야 한다고 하면 윗분들의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부속계약서가 계약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 기본계약서와 기간을 두고 맺는 부속계약 조항이 상충될 경우 어느 쪽이 우선하는지 지정해야 분쟁의 소지가 없다.
-이것 때문에 계약이 무효가 되면 너의 사표로는 책임이 끝나지 않아
나머지는 법무팀이 커버할 수 있어요 김부장님. 부탁드립니다!
김 부장님이 요즘 생 계약서 들고 와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8층으로 안 올라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저한테 은근슬쩍 메일 포워드하지 마세요."
PM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