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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열린 Oct 07. 2022

Schmetterlinge im Bauch haben

#09 내 장은 신호를 두 번 보낸다

내가 의무 교육받을 나이엔 유명 비디오 플랫폼이 없어서, 요일과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음악방송을 시청했어야 했다. 멋지고 이쁜 아이돌 그룹을 보면 눈이 즐거워지기는 했지만, 누군가를 특별하게 더 사모하거나 애착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뮤비와 방송에서 춤을 추는 가수들의 무대는 내게 순간의 재미는 가져다줬어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억지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야 하는 의무의 지루함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새로운 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섞는 손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그 편법에 편승하기 위해 억지로 음악방송을 챙겨보고 새 친구들과 곧잘 가수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어색한 친구들과 서로의 서사가 쌓인다면 그 후로는 굳이 아이돌로 이야기 주제를 꺼내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관계의 순조로운 초반을 위해 음악방송을 하는 주말마다 텔레비전 앞은 내 차지가 됐다. 사실 난 팝송이나 록에 더 관심이 많은 이상한 중학생이었다. 아이돌에 아예 흥미가 없던 것은 아니었어도, 누군가를 콕 집어 응원하고 사랑하는 건 이상했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감정은 늘 꽤 많은 열심과 체력을 소비하게 했다. 내가 아닌 타인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감정, 더 나아가 특히 그 타인이 절대 나와 말 한번 섞지 않을 연예인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의 팬으로 다가가질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정의 전복은 늘 뜻하지 않은 상황에 찾아온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차라리 어린 나이에 ‘덕통사고’를 겪었으면 좋았으련만 공부가 아닌 상사에 치일 나이에 연예인, 그것도 외국 배우에게 빠지다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누가 만든 신조어인지는 몰라도 ‘덕통사고’란 말이 내게 퍽 어울렸다. 정말 말 그대로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당한 덕‘통사고’다. ‘덕후’의 콩깍지는 눈꺼풀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내 눈에 씌어 졌다.

배우를 발견한 것은 극장이었다. 텔레비전 광고마다, SNS 광고마다 예고편으로 계속 나오던 영화에 호기심이 일어 친한 친구와 영화관을 찾았는데, 스크린 귀퉁이에 나오던 그 배우의 얼굴은 주연보다도 더 화면 가득히 내게 다가왔다. 듬직한 체격과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 그리고 낮은 목소리는 신이 날 위해 빚어준 이상형 그 자체였다. 

하필 유명하지 않은 독일 배우였다.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 조연으로 캐스팅된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할 진짜 무명의 배우였다. 세 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 러닝타임 내내 그 배우가 나온 장면은 몇 컷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뇌리에 새겨질 만한 연기를 보인 그 배우도, 그 배우를 놓치지 않고 뇌리에 새겨넣은 나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내 일상은 퇴근하고 돌아와 그 배우의 영상을 찾아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역시 무명답게 그가 나온 영화나 인터뷰 영상은 몇 개 없었고 그마저도 다 독일어였다. 조금이라도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장장 1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부해도 유창해지지 않았던, 나의 제1외국어인 영어는 취업과 함께 저 구석으로 내팽개쳐졌는데 스스로 다른 외국어 공부를 위해 연필을 잡다니 웃긴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독일어는 문법도 희한했지만, 단어 모양새도 희한했다. 다른 유럽어들은 영어와 비슷비슷한 모양새로 단어 철자가 외우기 쉽게 이루어졌는데 독일어 단어는 매번 혼자 튀어서 절대 외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가 아닌, 오만 뜻도 단어로 다 만들어져 있었다. 독일어를 공부하다 보면 역시 없는 단어 빼고는 단어로 다 존재한다는 어긋나는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재미있는 표현도 있었는데 이 문장은 내가 천년의 이상형인 독일 배우에 대한 마음이 식어도 절대 잊히지 않을 문장이다.

Schmetterlinge im Bauch haben.

배 속에 나비가 있다는 말이다. 독일에서는 설레거나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배 속에 나비가 날아다닌다고 표현한단다.

단순히 낭만적이라 저 문장을 못 잊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랑에 빠지거나, 긴장하게 되면 물리적으로 저 표현을 직접 겪게 된다.

슬프게도, 나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연애 시장에 들어선 나를 꽤 골탕 먹였다.

안타깝게 이성애자로 태어났지만, 타인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멋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학생 때와 달리 성인이 되고서야 연애를 시작했는데 과민성 대장증후군의 존재를 그때 알아차리게 됐다.

소개팅은 관계의 시작을 꽤 멋쩍게 만들어버린다. 두 사람이 한 가지 목표로 만나서 서로 흥미로운 것처럼 개인적인 질문을 던지고 헤어질 때까지 거짓 웃음을 짓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민망하고 그렇게 싱거울 수가 없다. 어릴 때처럼 공통점을 찾기 위해 연예인 이야기를 꺼낼 나이도 지났으니 그동안 갈고 닦았던 사회성을 발휘해야 하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런 의무적인 만남에서 초장부터 설레기는 힘들다. 나는 그런 소개팅을 준비할 때마다 늘 잠잠한 마음 상태를 유지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내 장은 아니었나 보다. 아주 속에서 불이 났다. 상대방과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을 때마다 배속이 요동을 쳐서 화장실을 대여섯 번이나 다녀와야 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카페에서 두세 번, 식당에서 두세 번. 어느 때엔 구두 바닥에 휴지를 붙이고 나온 일도 있었다. 상대 보기가 참 낯부끄러웠다. 배에서 들리는 천둥소리는 연애가 시작되고 나서도 상대방이 편해질 때까지 계속됐다. 소개팅으로 이어진 인연일 때만 이런 것이 아니다. 친구일 때는 편안한 관계였어도 관계의 발전을 조금이라도 도모할라치면 항상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들렸다. 대변 주머니는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혼자 설레발치고, 긴장되면 매번 함부로 설쳐댔다.

그나마 어릴 때는 상황이 괜찮았다. 이십 대 초반에는 서로가 뚜벅이인 커플이라 내 장이 외치는 소리는 세상 소음에 묻힐 수 있었다. 나는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핑계로 매번 야외에서 내 소리를 잠재웠다.

영화관이야말로 세상 소음의 최고봉인 장소라, 내 울부짖는 요란한 소리가 묻히기 딱 좋은 공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깊숙하게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다.

장르가 액션이 아니고서야 중간중간 오디오가 나오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아무런 음향이 나오질 않는 영화관은 마치 절간처럼 고요하다. 아주 심각하게.

특히 영화 첫 부분은 대부분 무음의 잔잔한 화면으로 출발하는데 그때마다 내 뱃고동 소리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기 싫어서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고 다리를 꼬고 난리를 쳐댄다.

나중에 좀 편해진 애인이 내게 말하길 영화 초반에 방귀 뀌어서 냄새 날리느라 그런 줄 알았다고 자신의 오해를 덧붙여준다. 방귀는 좀 멀리 간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 피리가 나오는 길목에 문제가 생긴 건 마찬가지니 그 오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문제는 내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만나는 남자의 연령대도 올라간 것에서 새롭게 시작됐다. 그들이 데이트에 차를 가지고 오면서부터 나는 더 적잖이 곤란해졌다.

단둘이 있는 차 안 그 고요한 공간에서 내 장은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꾸르륵 소리를 배고픔의 소리로 착각한 상대방은 의문을 표한다. 방금 밥 먹고 왔잖아? 저렇게 물을 때마다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진다. 속으로 장에게 재빨리 말을 건다. 제발 닥쳐, 넌 배고픈 게 아니야, 암만 타일러봐도 내 장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나 보다.



연애 초반에 놓인 나에게, 나비는 언제나 내 안을 휘젓고 다니며 내 의사와 달리 배 속을 뭉치게 했다. 장까지 오그라트린 건 당연히 덤이었다. 나비를 잠재우려면 상대방에게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일은 드물어졌다. 나비는 이성과의 데이트보다 회사에서 곤란할 때 내 안을 더 날아다녔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발표를 맡을 때마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나를 망가뜨렸다. 전혀 설레지도 않는 부장과의 면담 자리에서까지 나비는 내 안을 날뛰며 활개 쳤다. 속이 왜 이러지, 부장은 설레기보다 때리고 싶은 인간 유형에 더 가까운 표본인데.

부장에게 혼나야 하는 자리거나 연봉협상으로 마주 볼 때마다 나비는 늘 날개를 쳤다. 이렇게 긴장되는 순간마다 내 속이 말이 아니다 보니 장거리를 자동차로 이동할 때 특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행에게 민폐였으나 어쩔 수 없이 중간에 휴게소를 꼭 들려줘야 했다. 대중교통으로 버스를 타야 하는 일정이 생기면 미리 겁을 먹고 걱정했다. 외출준비를 하며 내 장은 나에게 신호를 한 번 보내고 차에 타서도 또 한 번 신호를 보낸다. 이때는 화장실에 앉아 있는다고 시원하게 목표물까지 보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 정도면 나비는 사랑의 감정적인 날갯짓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로 날갯짓을 치는 것 같다. 연애를 시작하고 받은 나비의 저주인가 보다. 어릴 때는 긴장되어도 안 이랬는데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며 심해졌다.


 

업무 스트레스로 내 안을 뒹구는 나비의 날갯짓이 심해지면 그와 반대로 데이트 때 쳐야 하는 사랑의 날갯짓은 약해졌다.

내가 누군가의 팬이 되는 것을 거부했던 건, 내 한 감정을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 쏟아붓기에는 얄팍한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라 이제 진짜 내가 만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의 개인 팬이 되고서, 따뜻하지만 복잡하고 부드럽지만 어려운 감정을 마주 보게 됐다. 하지만 순간이 영원하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에 냉소적으로 변하게 됐다. 혹시 이 때문에 나비는 설레는 순간보다 정신적으로 긴장되는 순간에 더 날갯짓을 치는 건 아닐까. 사랑은 하면 할수록 더욱 서툴러지는 것 같다. 이별 또한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이별이 긴장되고 스트레스를 주는 순간인 건 맞지만, 그때엔 나비가 날갯짓을 쳐서 나를 화장실로 직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별엔 나비의 날개가 배 속을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까마귀가 심장을 쪼고 있으니 말이다.

헤어지는 순간은 까마귀가 나를 괴롭히고 사랑하는 순간의 시작에는 매번 냉소가 발목을 잡았다. 과거의 실패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실망과 비관은 새로운 사랑의 설레는 감정까지 앗아가 버렸다. 감정이란 영원하지 않고 사랑 또한 유한하다. 더이상 사랑에 새 기대와 희망을 품지 않는다. 아마 나비는 이 때문에 설렘보다 긴장될 때 이제 나를 더 찾나 보다.




이별은 어렵고 인생은 혼란하다. 때문에 나는 잠시 타인을 사랑하는 감정을 내려놓았다. 예전처럼 타인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멋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얄팍한 자존심을 부리고 싶어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타인을 의심하고 포기하며 나를 갉아먹기보다는 본인을 돌봐야 하는 순간의 필요성을 느낄 뿐이다.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의 팬이 되기보다 브라운관에 나와 있는 사람의 팬이 되기를 잠깐 자청했다. 그렇다고 배우가 내 사랑의 대체품이 된 것은 아니다. 마음이란 건 어쩔 수가 없어서 사랑을 내려놓았다고 설레는 감정이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더라. 나는 배우를 보고 정말 순간적인 ‘덕통사고’를 당한 것은 맞았다.


어릴 때 친구들이 걸었던 그 길을 뒤늦게 걸으며 내게 말을 건네주지 않을 이에게 사랑을 전하고 내게 상처를 주지 않을 이에게 기대를 건다. 내게 온기를 나눠주지 않을 이에게 설레면서 좋은 점은, 직접 그를 마주하지 않는 한 나비가 내 배속을 휘젓고 다닐 일이 없는 것, 단 하나뿐이다.






Photo by Andra C Taylor J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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