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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웨인 Jan 21. 2018

터럭만큼 용서받고 싶다

아들아 사랑한다.

아들이 하나 있다. 잠든 아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놈 눈을 바라보고 세 번 눈물 흘린 것을 기억해냈다. 외국에 있을 때라 아들이 태어난 것을 보지 못했다. 3개월이 지나 처음 보았다. 빠알간 원숭이 새끼 같았다. 낯설고 신기했다. 서툴고 어설프게 엉거주춤 안았다. 어설피 안느라 팔이 아팠나 보다. 눈을 마주치니 주룩 눈물이 난다.


초등학교 1학년은 반장이 없다. 모두가 반장이고 반장이 아니다. 2학년으로 올라갔다. 아들이 회장 선거를 한다고 한다. 죄 없이 태어난 아들이다. 최초로 다른 이와 비교되기 시작한다. 비교와 경쟁은 밤이 없는 곳의 그림자처럼 아이가 자라 소멸할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눈물이 흘렀다. 아빠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서울을 떠나 이사하게 되었다. 근처 오산 중학교에 배정받은 아들을 전학시키기 싫었다. 나는 11살 때부터 혼자 고속버스를 탔다. 시골에서 서울까지 5시간 반 거리를 밥 먹듯 오갔다. 부모님께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낡은 버스를 탈 때마다 정신은 까무러쳤다.


신학기와 이사 예정일이 맞지 않았다. 일산 이모 집에서 새 중학교에 다니게 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무리했다. 한 달간 아들을 보지 못했다. 태어나 처음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아들이다. 13살 아들의 눈을 보니 눈물이 난다.


흙 들어간 뒤에도


고통은 나로서 마감되어야 한다. 연을 맺은 모든 관계에 아픔을 줄 권리가 내겐 없다. 자식으로? 아버지로? 친구로? 연인으로?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고통을 줄 수 있을까. 한 줌 기쁨, 즐거움, 웃음, 그리고 보람은 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기꺼이 너의 고통과 아픔을 강제할 수 있을까?


의지박약의 아빠를 만난 네게 멍석말이를 당해도, 존속폭행이란 죄목으로 고소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아들의 눈을 보고 울고 싶지 않다. 눈에 흙 들어갈 때까지, 흙 들어간 뒤에도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다. 결국,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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