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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것이 귀한 것이다

by 안나

“흔한 게 귀한 음식이에요”

서로 상이한 두 단어를 등호로 정리한 이는 이상구 박사였다. 한창 건강강좌로 인기를 끌던 그는 “어떤 음식이 건강에 좋겠냐?”는 질문을 던진 후 ‘흔한 식재료로 만드는 음식이 건강식품’이라고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노란 콩이 더 흔해요? 검정콩이 더 흔해요? 더 흔한 게 건강에 더 좋은 거예요.”라는 결론의 근거는 그의 신앙이었다. “하느님께서 일부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식재료를 건강식품으로 주셨겠어요? 아니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흔한 식재료를 건강식품으로 주셨겠어요?”


신앙에 기반을 둔 비논리적인 주장이었지만 이미 건강전도사, 엔돌핀 박사라는 별칭을 가진 그의 논리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당시 값비싼 건강식품이 난립하던 건강식품 춘추전국시대에 그의 명쾌한 논리는 적어도 나에게는 논란의 종지부를 찍게 했다. 이후로 나는 평범한 식재료의 세끼 식사 외에는 특별히 건강식품을 찾지 않는다. ‘밥이 최고의 보약’이라는 말에도 열렬히 동감한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 우리 농산물 직매장이 있다. 매주 사람들의 손에 가장 많이 들려 나오는 것이 두부, 콩나물, 계란이다. 가장 흔하기에 가장 많이 먹는 이 3종 세트가 건강식품이라는 확신이 든다. 한의원 원장님도 같은 논리를 편다. “요즘 컨디션이 많이 떨어져요”라며 은근히 보약 권하길 원하는 나에게 “그냥 좋은 쇠고기 사 드세요”라고 체질 식품을 권하는 것으로 정리를 한다.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환자와 한의사가 바꿔서 하는 대화가 되어버린다.


‘흔한 것이 또한 귀하기도 하다’는 논리가 어찌 건강식품에만 해당되겠는가. 나는 대인관계가 심플한 편이다. ‘심플하다’고 표현했지만 더 정확히는 대인관계의 가지 뻗치기를 잘하지 못한다. 퇴직한 남편을 비롯한 가족과 여행을 같이 하는 몇 명의 친구들로 내 열 손가락이 굽어진다. 일상을 함께 하는 그들과의 건강한 관계가 내 삶의 질을 좌우한다. 이들이야말로 나를 둘러싼 최고의 환경이기 때문이다.


행복 유전자가 좀 부족한가 싶을 때도 있었다. 천성적인 약골로 태어나 눈뜨는 아침이 그리 쾌快하지 않는 나에 비해 “오늘은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눈을 뜬다는 남편을 볼 때는 살짝 질투심 같은 것이 들곤 했다. 이런 내가 행복 유전자 최고인 남편을 만난 것은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만큼이나 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물론 매일의 재미있는 일에 빠지지 않는 음주로 내 행복지수가 뚝뚝 떨어지는 날도 있었지만 남편이 내 최고의 환경이며 안전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 아침에도 남편이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기척을 느낀다. 아침형 인간인 남편은 새벽 운동으로 하루를 연다. 올빼미 형에 잠귀 밝은 나를 위해 맨발로 저벅거리는 소리를 예방하고자 깨어나면 양말부터 신는 자신의 배려를 늘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배우자 지향적인 태도는 결혼생활을 오래 하여 친구 같은 부부가 되면 얻어지는 전리품 같은 것이다.


가벼운 여행을 같이 하는 친구들이 있다. 남편이 포함된 모임 이름이 ‘콩콩’이다. 여행 가서는 콩나물을 비롯한 일체의 식재료로 음식 해 먹는 수고를 멀리하자는 주장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여행에 최대한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평균 나이 60대 초반인 멤버들은 여행마다 실수가 끓이질 않는다. 남 녀 화장실 구분 못하고 태연히 일 보고 나오는 일은 이젠 실수담에도 끼지 못한다. 내차 남의 차 구분 못하고 차 문을 덜컥 열어 상대를 놀라게 하는 일도 애교가 있는 편이다. 아예 남의 차에 턱 하니 앉아있기도 하고 선글라스를 쓴 채 ‘왜 이리 차 안이 어두우냐’고 타박하는 작은 실수들은 함께 늙는다는 안도감과 일치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런 친구들이야말로 메말라가는 정서를 회복시켜주는 안전망들이다.


식재료와 사람이 참 많이 닮았다. 매일 먹는 밥이 최고의 건강식품이듯이 늘 옆에 있어 흔한 관계처럼 보이는 그들이 귀한 사람들이다. 오늘도 건강한 관계, 흔한 식재료로 보약 같은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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