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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여행, 1일 1 숲 제주여행

by 안나

버릇 한 가지가 있다. 여행을 앞두고 집안 대청소를 하는 것이다. 긴 여행이든 짧은 여행이든 쓰레기통까지 말끔히 비워놓고 나가야 한다. 오해할까 싶어 밝혀두자면 나는 깔끔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몸을 쓰는 일에서는 무능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청소는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러한 처지에 대청소까지 하고 나오자면 얼마나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겠는가? 그래서 대부분 여행지에 가서 앓아눕는 걸로 시작하거나 애써 버티다 집에 돌아와 쓰러지곤 한다. 여행 기분에 이삼일 멀쩡하다가 나흘째 되는 날부터 여행 준비 부작용에 시달리니 여행지에서 얻은 별명이 자칭 타칭 ‘3박 4일’(일용 몸)이다.

결혼하고 나서 직장을 그만두니 처음 몇 달간은 편했던 일상이 차츰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결혼 전, 한 달에 한 번 받는 월급은 뭔가 생산적인 삶을 살았다는 증표가 되었는데 결혼 후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생산적인 삶에서 점 점 거리가 멀어지는 듯 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증상은 아기를 가지면서 점차 줄어들었는데 생명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산부의 삶이 생산적인 삶이라는 타협을 하면서 막막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중심의 태도는 많은 부분에서 심신을 피곤하게 했다. 여행은 ‘일이 아닌 쉼’이라는 생각과 그 쉼을 미리 메우고 여행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는 청소라는 심리가 작용했다.


다행히 관계중심의 남편을 만났다. 내일을 위해 오늘 더 열심히 일하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내일은 없고 오늘만 있는 것처럼 오늘을 더 열심히 쉬는 남편을 만난 것이다. 남편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좀 쉬어야지”이다. 밥을 먹고 난 후에도, 운동을 다녀와서도, 텔레비전을 보고 나서도, 심지어 잘 자고 나서도 “좀 쉬어야겠다”라고 말한다. “더 바랄 게 없다”는 말도 많이 했다. 30대의 남자가 밥 먹고 배 두들기며 소파에 딱 누워 “더 바랄 게 없다”라고 하면 그게 참 이상해 보였다. 소박하고 낙천적인 삶의 태도로 보이기보다는 퇴직한 이후 삶을 열심히 살아온 증표로 할 수 있는 정도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생산적인 삶’에 대한 강박을 남편에게도 적용했다.


여행에 대한 접근도 많이 달랐다. 대청소가 여행 준비인 나와 달리 맛 집 탐색이 남편의 여행 준비 일 순위였다. 3박 4 일용 내 체력은 해외여행을 여행지에서 점차 밀어냈고 국내여행 중 공항을 가진 소도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제주여행이 주요 여행지로 부상했다. 그렇게 해서 매해 제주여행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제주여행은 2013년부터였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해이다. 매일 안부를 물어야 하는 시어머님에 대한 심리적 부담으로 여행은 생각지도 못하다가 그 해부터 본격적인 제주 나들이가 시작됐다. 당시 유행하던 걷기 열풍으로 그 해 3번에 걸쳐 제주올레길 24코스를 모두 완주했다. 다리가 성성하던 때였다.


제주 올레길은 산길을 좋아하는 나와 바닷길을 좋아하는 남편 모두를 만족시키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호젓한 산길을 걷자면 왜 이렇게 사람이 없냐고 심심해하던 남편은 해녀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는 바닷길에 들어서면 얼굴빛이 펴졌다. 해산물을 안주로 하는 소주 몇 잔은 남편에게 최고의 에너지원이었다. 3박 4일에 최적화된 아내의 배낭까지 앞뒤로 메고 다니던 남편은 다음 해에는 2인용 큰 배낭으로 바꾸어 혼자 모든 짐을 책임졌다. 가장 여행다운 여행으로 기억되는 시간들이었다.

짐은 남편에게 맡겼지만 걷기 여행만으로 일관하기엔 어려운 시점이 왔다. 발가락에 잡히는 물집이 걷기 여행의 발목을 잡았다. 이후로 제주여행은 걷기와 렌터카의 합으로 진행됐다. 이전에 체험한 걷기 좋은 구간만을 선택해 걷고 나머지 구간들은 차를 이용했다. 진정한 제주 여행객들이 다닌다는 오름만을 정해서 걷기도 했다. 제주여행에 렌터카가 들어오며 크게 달라진 것은 맛 집 기행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올레 길에 들어서면 중간에 식당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아침을 먹은 후 편의점에서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는 것이 올레길 여행의 중요한 일이었다면 렌터카 이후론 많은 맛 집들이 가능성을 열어두고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맛 집 관련 책자를 상비하고 다니니 맛 집 기행이 더 수월해졌다.

몇 년 전부터는 제주 보름 살이를 하고 있다. 몇 달이고 머무르고 싶어 하는 남편은 3박 4일 체력인 나와 보름이라는 기간으로 타협을 봤다. 장기로 머물 수 있는 제주 살이용 단골집도 얻었다. 살림집까지 얻으니 렌터카에서 한 단계 발전하여 아예 자차를 가지고 들어가게 됐다. 손에 익숙한 살림살이들을 싣고 가 제주 특산물인 당근과 귤을 아침마다 쥬서기로 짜 먹으며 제주살이의 질을 한 단계 높였다.

나에게 여행의 이유 중 하나는 익명성의 보장이다. 소도시에 살며 성당과 집을 반복하는 생활 반경이 익명성의 범위를 더 좁혀 놓았다. 누군가에게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여행의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제주에서 보름을 지내다 보면 꼭 손님맞이를 하게 된다. 손님맞이는 남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준다. 나에게도 기쁨이지만 익명성 뒤에 따라오는 또 다른 여행의 목적인 내 시간을 갖는 부분에서는 살짝 망설여지기도 한다. 내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나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남편은 자기만의 시간이라는 부분에서 늘 타협의 대상이 됐다.

올해 제주여행은 코로나19로 깊은 숙고 끝에 이루어졌다. 코로나로 쉴 시간이 많이 주어졌지만 강제적인 휴가가 주는 심리적 피곤함이 많이 쌓여 있던 터였다. 나는 꼭 내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여 익명성의 자유를 누리고자 결심하고 대청소 후 제주여행에 들어갔다. 이번 제주 보름 살기는 약속된 손님맞이를 다음 해로 미뤘다. 제주 책방과 숲에서, 숙소에서 빈둥거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섬에 있는 서점’(개브리얼 제닌)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책방이 없는 동네는 동네라고 할 수 없다”는 말도 중얼거리며 제주 책방을 어슬렁거렸다.

이번 여행에서 고수한 것 중 하나가 1일 1 숲이었다. 지나가다 숲만 보이면 들어갔다. 트렁크에는 언제라도 인 in 숲을 할 수 있는 깔판과 서너 권의 책, 그리고 생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숲에만 들어가면 잠이 왔다. 여름내 설친 잠에 대한 보상심리의 발동 같았다. 9월, 아직은 여름에 살짝 엉덩이를 내주고 있었지만 햇빛보단 시원한 그늘이 대세인 숲은 늘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숲에서도 그냥 빈둥거리며 유튜브를 보는 남편에 비하면 나는 읽기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일도 휴식 삼는 남편에 비해 휴식도 일삼은 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in 숲이 마쳐지면 남편의 시간이 왔다. 술시인 것이다.

쉬는 것에 최적화된 남편은 늘 여행을 계획하고 생산적인 삶을 추구하는 나는 이 늦은 시간에도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서로 다른 남편과 나의 합이 점점 좋아진다는 것을 나이 들어가며 알게 되었다. 서로 달라서 서로 채워줄 곳이 생겼다. 둘이 만나니 혼자라면 계획하지 않았을 여행으로 긴장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여행 전 대청소와 여행 후 앓아눕기로 인생의 한 페이지를 꾸려가고 있다.

Before 여행, After여행은 자업자득이다.


(2020년 9월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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