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결혼식 전날 밤 나는 온 식구를 불러 모았다. 일생일대 가문의 큰 행사인 결혼식을 총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26살 아들은 10년은 나이를 아래로 본 미용사에게 학생 머리로 짧게 커트를 하고 들어와 있었고 모처럼 술을 마시지 않은 남편도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키가 작은 딸은 역시나 키가 작은 아빠보다 키가 커 보이면 안 된다며 주문한 5센치짜리 굽의 구두를 꺼내 보였다. 아마 평소에 신지 않던 굽 높은 구두로 걷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키 작은 핸디캡보다 편한 것을 추구하는 딸은 남편을 꼭 빼닮았다. 아직도 한복 고름을 제대로 못 매는 나는 새로 맞춘 한복을 어설프게 입고 섰다. 바닥에 찰랑 거리는 한복 치마를 혹시나 밟을까 해서 할 수 없이 굽 있는 고무신을 신어야 했다. 남편 역시 일 년이면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양복을 입고 섰다.
“여보, 기왕 양복 입어본 김에 딸하고 행진 한 번 해봐요.”
“그거 뭐 하러 해 봐”
“내일은 정신없으니까 오늘 차분히 딸하고 한 번 걸어 봐요.”
인륜지대사인 결혼식 총감독으로 나름 권력을 행사하는 내 말에 의의를 제기하는 가족은 없었다. 딸과 남편이 거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짧은 행진을 했다.
“걷는 거야 유정이는 30년 가까이 해왔고, 당신은 60년 가까이해 왔으니 별 문제가 없겠지?”
그때 깍두기 머리 비슷하게 커트를 하고 들어온 아들이 슬그머니 한 마디를 했다.
“저 양복 벨트가 없네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아들에게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잘 챙겨 오라고 당부를 했는데 바지 벨트에서 문제가 생겼다.
밤 9시가 넘은 시간, 해결사 남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다행히 문을 닫지 않은 대형마트에서 급하게 벨트를 조달했다.
“역시 결혼식 복장으로 서 보길 잘했어.”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듯했다. 내일 서울에서 출발하는 친정식구와 우리 부부의 친구들을 태운 버스만 제시간에 도착하면 된다. 3개월 가까이 진행해온 결혼식 감독으로서의 시간은 이제 끝나가는 것이다.
요즈음 결혼 준비는 대부분 예비부부들이 다 한다는데 딸은 많은 부분에서 나에게 의존했다. 전문성은 없는데 성격은 급한 나는 이미 결혼 3개월 전에 지나가는 길에 들어간 가구점에서 신혼가구 일체를 구매했다. 남편의 여름휴가 때는 딸과 셋이 함께 상경하여 대형 신혼 물건 매장에서 그릇이며 이불이며 기타 혼수를 다 장만했다. 결혼 전 토요일이면 혼자서 구경삼아 갔던 남대문 새벽시장을 이제는 남편과 딸 이렇게 세 식구가 되어 시장 내 유명한 맛 집을 찾아다녔다. 다 찌그러진 양푼에 갈치조림을 담아주는 맛 집에서 식사를 하다 보니 가족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딸의 결혼식이 있을 전동성당은 전주 한옥마을 관광지 안에 있었다. 성당 문을 사이에 두고 성전의 거룩함과 관광지의 분주함이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결혼식 한 주일 전에 나는 총감독답게 딸과 전동성당의 결혼식에 참여하여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옥마을 관광상품인 화려한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가운데 성당 마당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결혼식이 축제라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성과 속이 혼재하는 모습 그 안에 결혼생활의 두 기둥이 보이는 듯했다.
결혼 전 날 밤, 모든 것을 점검했다 했는데 당연 완벽이란 있을 수 없는 거였다.
결혼식 당일 화장을 하는 미용실에서 남편은 구두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했다. 단화만 즐겨 신는 남편에게 일 년에 한 번 신을까 말까 한 구두가 새 구두인 채 남아있으니 새로 장만하는 것이 낭비지 않겠냐고 했는데 남편은 내 의견대로 구두를 장만하지 않았고 결국 이게 문제를 일으켰다. 구두 바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남편은 즉시 지인에게 구두를 사 올 것을 부탁했다.
‘검은색 남자 구두’
간단한 주문에도 지인은 여러 디자인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고 전문 구두 닦는 곳을 찾아 반짝반짝 윤나는 구두를 공수해 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화장으로 씨름을 하고 있었다. 본시 안색이 창백한 나는 평소에 조금 강한 색의 립스틱을 사용했다. 미용사가 공들여해 놓은 화장에서 나는 전혀 바르지 않은 듯 발라놓은 입술 화장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평소 눈이 예민하다 이야기하여 속눈썹은 붙인 듯 안 붙인 듯했는데 혈색이 살아나지 않는 연한 입술 화장은 반드시 교정을 하고 싶었다. 밀려드는 신부화장으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보이는 미용사는 그 상태에서 화장을 끝냈고 나는 스스로 교정을 해야만 했다. 어찌어찌 맘에 들지 않은 화장을 정리하고 나가보니 일찍 화장을 끝낸 딸과 사위 그리고 안 사돈이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한 버스는 11월 첫 주 단풍철 차량으로 극심한 교통체증을 겪었다. 5시간 넘게 걸려 예식시간에야 겨우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는 하객들의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 아침식사로 평소에 먹지 않던 빵을 드신 친정 어른들은 멀미에다 체기까지 더한 것 같았다.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실 삼촌 신부님은 이미 33년 전 우리 부부의 결혼 주례를 하셨다. 이제는 일흔을 넘긴 삼촌 신부님이 손녀의 주례를 맡아 주시니 ‘대를 잇는 결혼 주례’,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감격이 컸다.
33년 전 아버지와 친정 성당에서 혼배 예식(결혼식) 입장을 했던 나는 성당의 크기만큼이나 길고 긴 성전 통로를 끝에서부터 걸어 들어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성전 통로 길이가 너무 길어 통상 가운데쯤에서 입장을 한다는 거였다. 끝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나는 멀리 보이는 성전 제대 앞까지의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드레스는 끌리고 마음이 급해졌던 내 발걸음이 빨라졌나 보다. 함께 걸어가시던 아버지가 한 마디 하셨다. “안나야, 천천히 가자.”
33년이 지난 지금 남편이 저만치 딸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딸은 5센치 짜리 굽의 구두를 신고도 아빠의 팔짱을 꼭 끼고 전폭적으로 몸을 의지하며 걸어 들어왔다. 성당 제대위에 앉아 계시는 신부님들의 얼굴이 동시에 밝아졌다. 나중에 들으니 “딸이 아빠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모습은 처음 봤다.”는 거였다. 통상 딸이 아빠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고 들어오고 아버지는 딸의 손을 배우자가 될 사위에게 건네주는 것이라는데, 그리고 그때 모든 아버지들은 울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팔짱을 끼고 들어온 딸의 팔을 쑥 빼고는 그냥 자리로 들어왔다. 처음 해 보는 일이니 디테일하게 연습이 될 리가 없는 부분이었다.
‘딸이 아빠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모습도 참 보기 좋더라’라는 한 신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통상적인 신부 입장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 가족 4명은, 아니 사위까지 포함해 5명이 된 우리 가족은 가까이 있는 딸의 신혼집으로 들어가 평소 입지 않아 불편했던 예식의 옷과 신발을 벗어던지고 잠시 대자로 뻗었다. 그러다 감독으로서 마지막 동영상 촬영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명이 다시 한 줄로 나란히 서서 동영상을 찍으며 한 마디씩을 했다.
결혼식 감독 입문은 이렇게 끝이 났다. 결혼식이 끝나고서야 남편의 구두를 비롯한 각자의 에피소드를 나누며 웃을 수 있었다. 감독을 안 했어도 결과에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 경험이 있으니 다음번 결혼식 감독은 더 잘할 수 있으려나?
다음 결혼식은 아들이 신랑이 될 터이니 벨트를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딸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두 아들을 붙잡으러 다니느라 5센치 짜리 굽의 구두는커녕 사위의 팔짱을 끼는 여유 따위도 없을 것이다. 나는 웬만하면 미용실에서 해 주는 화장에 전폭적으로 맡길 것이며 머리를 몇 달씩 기르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의 구두도 미리미리 사서 몇 번 신어보게 하고 윤도 반짝반짝 나게 닦아 놓을 것이다. 친정 어른들은 전 날 오시게 해서 푹 쉬고 예식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자! 그러면 모든 게 준비된 거 맞지?
그런데, 올해 나이 서른인 아들에게는 여친이 없다. 언제쯤 여친이 생기려나 기대해 보지만 한 번도 여친의 ‘여’ 자도 들어보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갔다. 게다가 이제는 남편이 던지는 ‘아들, 언제 여친 사귈 거야?’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하는 눈치다. 결혼 주례를 맡아 주실 삼촌 신부님은 일흔을 훌쩍 뛰어넘어 여든을 향해 가시고 있다. 손주까지 3대에 걸쳐 주례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우선 아들의 결혼 주례에는 꼭 모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