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Feb 02. 2022

아버지의 설빔

아버지에게서 설 명절을 앞두고 문자가 왔다.     


“금년 설 모임은 각자 집에서 보내자꾸나. 오미크론도 극성이니”    

 

아버지에게서 이런 문자를 받은 지가 벌써 2년째다.

금세 수그러들겠지 했던 코로나19로 두 해전부터 명절에 부모님을 뵙지 못했다. 지방에 살고 있는 나는 명절이 공식적인 상경 일이건만 몇 번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명절을 지내면 구순을 맞으신다. 두 살 아래인 엄마와 지금 사는 동네에서 30년을 넘게 사셨다. 코로나가 지속되면서 바깥출입이 뜸해진 엄마가 급격히 기운을 잃으셨다. 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 아버지와 달리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엄마는 점차 체력이 떨어지고 집안일을 힘들어 했다. 엄마 입에서 실버타운 이야기가 나왔다. 이전에도 간혹 나왔던 실버타운이었지만 엄마가 이번엔 꼭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서 코로나로 모이지 못했던 4형제가 모이게 됐다.     


평소 자연인을 꿈꾸며 전원생활을 원했던 아버지도 꿈을 내려놓고 엄마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주거환경을 찾으셨다. 몇 군데의 실버타운을 방문했지만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에게 실버타운 거주가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데 형제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던 중 형부가 돌아가시고 딸 둘을 출가시키고 혼자 사는 언니가 부모님 집으로 들어와 돌봐드리겠다고 했다.     


엄마 아버지는 지금 사는 집에서 할머니의 마지막 10년을 함께 했다. 아버지 엄마 모두 환갑을 넘기며 할머니를 모신 셈이다. 환갑이 지난 언니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뿌려놓은 삶의 모습이 전승 되는구나 했다. 언니가 들어 간 후 엄마는 점차 기운을 회복하시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기브 엔 테이크’라는 세상 속 계산기를 들이밀지 않아도 할머니의 노후를 정성껏 돌봐드린 엄마 아버지가 자식의 봉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싶었다. 그리고 ‘선한 끝’이 있다는 말도 실감 났다.   

  



명절을 일주일 앞두고 남편과 나는 엄마 아버지를 뵈러 상경했다. 마스크를 벗지 않기 위해 점심은 휴게실에서 먹고 아버지 집에서 머무는 4시간 동안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4시간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귀가 어두워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주로 듣기만 했던 아버지가 둘째 딸과 사위와 만난 자리에서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사후 장기기증과 연명치료 거부, 복지기관 기부등 이전부터 해 오시던 이야기들을 반복하셨다. 엄마는 ‘장례비용으로 준비했다’며 통장도 내 보이셨다. 두 분 다 삶의 마지막 시간을 준비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봉사하던 성당의 사진집을 보며 우리보다 더 젊었던 시절의 아버지의 모습도 보았다. 한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드라마 한 편이었다.     


집을 나서는 내 손에 엄마는 세뱃돈을 들려주셨다. 몇 해 전부터 챙겨 주시는 부모님의 세뱃돈에 나는 어린 시절의 딸로 돌아간 듯 응석이 부리고 싶어졌다. 다른 손엔 구부러진 허리로 담그신 봄 동 겉절이도 들려 주셨다.      


설 명절 아침에 아버지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항상 기억하고 훈련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라. 이것이 아버지가 주는 설빔이다”


설빔이란 말이 신선했다. 설빔이란 어려웠던 시절에도 설을 맞이하여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입히기 위해 새로 장만하는 옷이나 신발 따위를 이른다고 했다. 아버지는 올해에도 삶의 좋은 습관들을 늘 기억하고 몸에 베이도록 훈련하라는 덕담을 주셨다. 자칫 무거워질 조언을 설빔이라 표현하는 아버지의 언어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옷을 입듯 늘 가까이 해야 할 ‘기억과 훈련’이라는 설빔을 보내주신 구순의 아버지께 증손주가 드리는 세배영상을 보내 드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