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수업
어느 날 딸아이가 이유 없이 짜증을 냈다. 아침부터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고, 가방이 무겁다고 하고, 심지어 내가 물어본 질문에도 투덜거렸다. 예전 같으면 나도 덩달아 짜증이 올라왔을 것이다. “왜 이렇게 예민해?”, “말투 좀 똑바로 해.”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깨달은 게 있다. 아이의 짜증은 ‘신호’라는 것.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숨어 있다. 아이들이 짜증을 낼 때는 대부분 세 가지 감정이 겹쳐 있다.
① 불안
어른들처럼 아이들에게도 예상 못한 변화는 불안을 만든다. 친구와의 작은 갈등, 학교에서의 긴장감, 선생님의 한마디까지 마음속을 흔든다. 그 불안을 말로 풀지 못하니 겉으로는 ‘짜증’이라는 단어의 옷을 입고 나온다.
② 피곤함
육체적 피로는 감정 조절 능력을 낮춘다. 어른도 피곤하면 예민해지는데 아이들은 그걸 “나 지금 힘들어요”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대신 물건을 탁 내려놓고, 툭툭 말이 짧아지고, 작은 일에도 금세 화를 낸다.
③ 인정받고 싶은 마음
아이의 짜증 속에는 종종 이런 욕구가 숨어 있다. “나 좀 봐줘.”, “나 서운해.”, “내 이야기도 들어줘.” 어떨 때는 단순히 부모와 눈을 마주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 짜증이 올라오기도 한다.
나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이해했다. ‘짜증’은 문제 해결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마음속에 쌓인 감정을 꺼내달라는 도움의 요청이었다는 걸. 그래서 요즘은 짜증을 들으면 이렇게 반응해보려고 한다.
“오늘 뭐가 힘들었어?”
“말하기 어려우면 나중에 말해도 좋아.”
곧바로 짜증이 가라앉지 않아도 딸아이는 조금씩 편안해진다. 짜증이 사라진 게 아니라, 아이의 감정이 ‘안전하게 놓일 자리’를 찾은 것이다. 아이의 짜증은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뭔가 해결하려는 조급함이 앞선다.
아이도 나도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아이의 짜증을 다루는 과정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도 다시 배운다. 아이의 말투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먼저 보는 사람이 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