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기복 아님 변덕 아님 주의
필자에게 글은 타임갭슐이다. 몇 달 전 유튜브에서 봤는데, 십수 년 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타임캡슐을 만들어 개봉하기를 약속했고, 실제로 지켰다. 다만, 물과 공기가 새어 들어가서 내용물이 전부 부패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글은 그럴 염려가 없다. 파일만 제대로 살아 있다면 말이다. 과거에 썼던 것을 읽어보면 지금이랑 생각이며 의견이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다른 사람 것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빠르게는 며칠 전 것만 봐도 그렇다.
"이십 대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그때에 비해 얼마나 성장했을까?"를 보는 재미도 있다. 남들은 최대로 글을 많이 쓴다는 이십 대 후반에서 서른 정도를 손 놓고 지냈다. 쓰기 싫었다. 앞으로 더 쓸 거라는 장담은 못하겠다. 브런치에 머물러 있는 한 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어서다. 일흔, 여든이 넘어서 과연 꺼내볼 수 있을까.
이십 대의 필자를 기억해 줄 사람은 사실상 없다. 그 타임캡슐과 안산의 몇몇 거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 아니다. 출근이 설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친구 사이에도, 가족 관계에서도 늘 웃음꽃만 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금전이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인생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인관계를 할까. '누군가 나를 특별하게 기억해 주기를 원해서'다. 유전자를 번식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투자했던 십 년의 시간이며, 수천만 원의 비용을 생각하면 외장하드 속 글들을 지울 수가 없다. 개봉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남산골 한옥마을 근처에 있는 타임캡슐에 가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안내 문구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손들에게 선사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영원히 붙잡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존재한다. 한 외국인 일가족이 사진을 부탁해 와서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십 대의 가시거리는 삼십 대, 사십 대를 보기에는 너무도 짧았다. 피터팬이 되리라. 영원히 철들지 않는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