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라는 선택
어느 날 윗선에 계시는 선생님 한 분이 이야기를 꺼내셨다.
”지금 병원에서(교수님들) 너네 일을 대신할 프로그램을 도입하려고 알아보고 있고, 입력 방식이 약간은 다른 00회사와 00 회사 두 개 회사 중에 선택할 것 같은데 혹시 회사 이름 들어본 적은 있어? “
‘헉! 이렇게나 빨리요?!’ 많이 놀랐다. 흘려듣는 소문으로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화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럼 저는 아니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팀 해체 위기설이 곧 도래하는 것인가 생각되었다.
이미 휴대폰에 음성인식이 된지가 언제이며, 텍스트 처리가 된 지가 언제부터인데 당연한 일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대학병원 영상의학과에 몸담으며 판독의가 영상이미지를 보고 판독내용을 녹음하면 그것을 듣고 타이핑쳐서 문서와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대체되려는 걸 보니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단순한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억울하다가도 어이없다가도, 어디로 로테이션될 것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내 마음 안의 균열은 이때부터 시작려되었던 것 같다.
00 회사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냐고 질문 주신 선생님은 내 머릿속을 이미 들여다보신 듯,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빠진 일 대신 어떤 일로 채울지를 고민하자"라며 다독여 주셨다.
오래전부터 흘려들었던,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던 일이 코앞에 닥치고 보니 어떤 말을 들어도 머릿속은 백지상태였다.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판독의가 판독한 녹음 파일을 듣고, 타이핑해서 안 들리는 내용이나 짤린 부분에 밑줄 쫙 끄어 종이로 뽑아 들고 판독교수님을 찾아 영상의학과 판독회의실을 지나는데 양복을 걸친 외부 업체 사람들 및 일부 관계자들 몇 명이 모여 모니터를 세팅하고 무언가를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심찮게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 날 따라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왠지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반대로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나의 온갖 관심은 회의실에 있었지만 못본척 천천히 지나쳐 왔다.
얼마나 똑똑한 프로그램인지‘참석해서 같이 들어보면 안 돼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나를 대체할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인데 사용 여부를 결정하실 교수님들과 함께 참석한다는 건 그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찜찜한 분위기일 것 같긴 했다.
내 기분도 킥보드를 타다 개똥을 밟았는데 미처 알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온 킥보드 바퀴로부터 퍼져 나오는 개똥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 기분이 나쁜데 원인을 찾지 못해서 그 냄새를 맡고만 있는 딱! 그 기분이었다.
'맘에 안 들면 안 쓸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신경 써?!‘
’나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로테이션 어디로 시킬까? ‘
‘이참에 면허가 필요 없는 부서를 찾아 지원해 볼까 ‘
’니 적성에 맞는 일이 뭔데?‘
생각들로 머릿속은 복잡했다.
며칠 뒤 관계자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테스트로 00 회사 3대가 세 분 교수님 컴퓨터에 사용될 거고 만족스러우면 차츰 늘려 나갈 거고 그렇지 않으면 원점으로 돌아가겠지. 근데, 사용하는 게 맞지 않겠어? 선생님 생각은 어때?”
'머리는 맞다고 하는데 마음은 아니라고 해요' 라며 초등학생스럽게 정직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네, 사용하는 게 맞죠”
“그래, 흘러가는 상황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
“네...”
문을 닫고 나오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과 관련하여 온갖 잡념들이 머리에 가득 차 힘이 들었다.
이제 교수님들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바쁜 교수님들은 새로 도입된 프로그램으로 인해 편하게 될지, 오히려 음성을 못 알아먹고 오류투성이라 시간을 빼앗기는 격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세 대가 배치된 자리의 교수님들의 녹음이 들어오면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신 건가 생각이 들었지만 차차 녹음 양이 2/3로 줄어든 느낌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1/2, 눈에 띄게 점점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국립대병원은 공무원처우를 받아 정년이 보장되고 잘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일이 없는 상황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 보이는가 하면, 나처럼 잡념이 가득 찬 사람도 있는것 같았다.
선임 선생님을 먼저 찾아갔다.
“선생님, 그 프로그램 한번 볼 수 있어요?”
그냥 궁금했다.
판독 의사로 빙의해서 녹음해 보았다.
음성인식이 거의 즉각 실시간으로 텍스트화되어 나오는데 “우와”감탄이 절로 나왔다.
오류를 내보려고 interstitial ‘인터스티셜’을 ‘인터셜’이라고 발음해 보았으나 앞뒤 문맥 파악해 정확히 interstitial로 텍스트화되었다.
대충 말했는데도 정확한 용어를 불어오는 것을 보고 재차 감탄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 교수님의 음성파일이 전혀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 부서원들끼리 “이제 000 교수님 아예 녹음 안 하시는데? 짐 싸자 하하“
내가 웃는 건 웃는 게 아니었다.
예상과 달리 너무 빠르게 자리 잡아가는 모양새가 기분이 참 별로였다.
‘타 병원에서는 5년째 교수님들이 적응 못해서 시름 중이라던데 5개월을 잘못 들었던 건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던 교수님들의 음성녹음파일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자 앉아서 쉬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 책을 읽었지만,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그냥 불편했다.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게 되면 새로운 사람을 상사로 모셔야할테거, 새로운 업무를 다시 익혀야 할테고...
20대 사회초년생의 입사 당시의 마음가짐으로 전체 리프레시를 해야만 한다.
편하고 익숙한 게 좋아져서..
신입 모드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체되어 나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에서 오는 공허함과...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직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이 사안에 대해 다들 공통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각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추측만 할 뿐이었다.
어디로 발령받을지 또는 남게 되면 어떤 일을 하게 될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 직장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 자꾸 질문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