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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이 필요해

원하는 건 단 하나

by 사공리셋

허드렛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책임감도 덜했기에 단순반복 업무를 행하는데, 몸은 편했을지언정 마음은 시끄러웠다.

‘쌓이는 게 없는 이러한 잡무는 또한 언제든 타인에게 대체되거나 사라질 수 있는거잖아'

매일 아침 출근을 해서 내가 깨어있는 시간의 반이상을 보내게 되는 회사라는 공간에서 쓰는 시간과 에너지라면 쌓이고 남는 게 있어야 한다 생각이 강해졌다.

10년 넘게 해온 일도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는 경험을 지나면서 '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해보게 되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공허함이 공존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읽을 책을 가방에 챙겼다.

마음의 평정을 찾고 다음 스텝을 생각하며 자기 계발의 시간으로 삼으며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보자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이곳에 묶인 채 흘려보내는 시간보다 한창 손 많이 가는 아이들 옆에 있는 게 훨씬 더 가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세상에 나를 내맡긴 채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남긴 현실이 지금의 모습인 건가 생각도 들었다.

현실부정하며 회사 밖을 뛰쳐나온다고 한들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

통장 잔고만 바닥날 뿐이겠지.


하지만...

왠지 모를 나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함께 시간이 선물하고 싶어졌다.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이 없이 세상이 정해준 이정표대로 지내온 나에게 솟구치는 퇴사 욕구를 막을 수가 없었다.

매일 출근하는 회사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잘 돌아가고 있었고, 그 안에서 혼자만 삐거덕거리는 마음을 달래 가며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프로그램이 도입될 것 같다는 말이 나온 이후부터 나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남편과의 대화의 주제는 매일 회사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였고, 마무리는 ”나 그만둘 거야! “를 입에 달고 살았다.

어쩌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내린 판단이 이미 오래전부터 결정되었던 터라, 결정적인 순간에 남편도 힘을 뺀 것 같았다.

"내가 뭘 해도 하겠지, 시간이 필요해. 좀 시간이 자유로운 일을 하면서 애들도 케어하고... 뭘 하든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아" 공감능력 떨어지는 남편에게는 현실적인 이야기만 돌려 반복하고 있었다.

남편도 지친 듯 "이제는 모르겠다, 알아서 해 "라는 말로 마무리지었다.

젠가 회사에서 홀로 독립할 나를 위해 '언어재활사'라는 면허도 따두어 당장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서 시간을 자유롭게 써볼 생각도 있었다.

물론 이런 일로 써먹게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퇴근 후 대학원공부가 숨구멍이었고, 마치 내가 사라진 것 같은 며느리와 엄마라는 역할의 프레임 안에서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선택한 선택지가 대학원공부였다.

시작부터 전공에 큰 뜻을 세우지는 않았기에 그냥 써먹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보험과도 같은 자격면허였다.

주변 직원들이 "왜 그만둬?""육아휴직 써도 되잖아""남편이 잘 버는구나" 여러 반응들이 있었지만, 나는 같은 대답을 반복하고 있었다.

"저는 회사밖으로 나가면 더 잘될 거라서요, 저한테 기회를 주는 거예요"라고 마음으로만 말하고 있었다.

현실감각 떨어지는 배부른 소리 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났던 것 같다.

진짜 겁이 나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려 드는 나 자신을 다시 대면하게 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애들도 키우고 일도 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볼 거예요 “

”부지런하다, 언제 그렇게 준비를 했대, 대단해 “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직원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누고 회사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불안한 마음보다 답답한 숨구멍이 트인 느낌이었다.

남은 육아휴직 2년을 사용하며 다음 스텝을 생각할 기회도 있었지만, 2년 동안 복직을 준비하며 휴직기간을 적절히 즐기다 지금 내리지 못한 결단을 2년 뒤로 유예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지금이었다.


우유부단함과 꾸물거림은 당신의 자존감(과 생존)을 보존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되겠지만,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의 가치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결단> 저자, 롭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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