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기서 영업할 수 없습니다

터줏대감의 행세

by 사공리셋

소속되지 않으면 독립적인 일을 할 수도 없는 직업으로 퇴사를 하고 보니, 창업의 영역은 한정적이었다.

퇴사와 동시에 새로 시작해 본 일은 한 달 만에 그만두었으니, 4인가족 씀씀이가 줄지는 않고 시간에서 자유롭고는 싶고... 알 수 없는 불안이 늘 함께하고 있었다.

'퇴직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분명 생활비로만 탕진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만은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은 초조했다.


사실 마음속 퇴직이 정해진 거의 3년 전부터 틈틈이 부동산 책을 읽고, 강의도 들으러 다니고, 상가매물 뒤적거리며 구경하고 영상들을 찾아보며 기준에 적합한 물건을 찾아 찜해두고 있었었다.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세대수가 많고, 모든 세대의 출입구는 여기를 지나야 만 가능하고, 재건축도 보고 있으니 평생 가져갈만한 상가예요. 주인이 사정이 있어서 급매로 낸겁니다."

글로 배운 수익률을 계산해 보니 시세보다 싸게 나온 것만은 확실했다.

"여기 임차인 금세 구해질 겁니다!! 여긴 비어있었던 적이 없어요, 내가 임차인 구해줄 거니까 걱정 마세요, 매매 말고 월세는 안 내놓냐는 전화도 받았어요!"

"아, 그래요? 주로 어디서 전화가 왔어요?"

"치킨집도 하나 있었고, 무인가게 영업팀장도 전화 오고..."

"무인가게요? 어떤 무인가게요??"

"빨래방인데! 어떤 돈 많은 사람이 영업팀장한테 빨래방 잘 될 곳으로 8개 상가를 구해보라 했다네요. 그 후보지 중에 여기가 괜찮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근데 월세가 비싸다고 얼마까지 가능하냐고 묻고 끊더라고요"

'무인가게? 내가 해볼까? 노동력 조금 보테면 월세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있는 거잖아'

상가에 가치투자도 되고, 현금흐름 창출도 되고, 1석2조!라는 생각에 급설레기 시작했다.

상가 월세가 안 나가니까 고정비용은 줄어들고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이었지만 오히려 굴러온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창업인데, 잘 알아봐" 그렇게 내 마음이 동하는 곳으로 빠르게 실행으로 옮겼다.

"영업팀장님 만날 수 있어요?" 남편의 컨펌을 받고 바로 영업팀장님과 약속을 잡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약간의 흥분상태였던 것 같다.

나의 경제적 책임이 투자와 수익창출로 동시에 해결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무언가 한방에 해결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으니...

대출 끼고 가진 현금 탈탈 털어 부동산 상가 매수계약, 빨래방창업계약등 이 모든 과정이 24시간 이내에 진행되었다.

그 정도로 무언가에 쫓기듯 마음이 많이 조급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에 와서는 나를 객관화 시켜 볼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설자리가 없어진 것에 대한 공허함. 그에 따른 불안감이 나은 결과였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이렇게 기회가 굴러들어 오다니'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신났다.


그렇게 나는 상가주인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무인빨래방 사장님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사업자가 되었다.


돌다리도 열 번 두드려보고 건너는 남편에게 이러한 '나'라는 사람은 난이도가 높은 와이프지만, 본인과 다른 행동력에 응원받을 때도 있다. 앞뒤를 잘 제지 않는 행동력으로 인해 분명 뭇매 맞을 때도 많다.

큰 사고 없이 알아서 수습해오다 보니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데, 퇴사를 하고 삶의 전환기를 맞는 지금의 내 상태는 이성적인 판단이 흐리고 감정적 상태 또한 정상적이지 않았기에, 뭐 하나를 시작하려고 하면 남편에게 자꾸 의지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의 일이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의 일이기도 했고, 퇴사를 반대했던 남편에게 빠르게 성과를 내어 남편을 안심시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시설창업, 온라인 창업, 지식 창업, 프랜차이즈창업등 여러 가지 종류의 창업이 있지만, 이 것은 시설창업인만큼 창업비용이 크고 큰 만큼 손은 덜가겠지만, F 성향의 나보다 팩트체크에 강한 T 성향의 남편의 도움이 크게 필요한 순간이었다.

상가계약서 도장을 찍은 후 당일날 밤 9시경에 빨래방계약서에 도장을 찍음으로서...

육아를 하며 나를 탐색할 충분한 시간을 선물할 수 있으며 향후 몇 년간 우리의 생활 또한 안정적일 것이며, 새로운 희망을 안겨줄 것이라며는 설레임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그 설렘은 몇 일 가지 않았다.

상가 매수 계약서를 쓰고 상가잔금을 2주 후로 잡았는데 잔금도 치르기 전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시점 사건이 터졌다.

부동산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고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이 안되어서, 그냥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여 무덤덤했다.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도 못했을뿐더러, 차선책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동산 아주머니는 흥분해 계셨다.


" 사모님, 참 덤덤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가 있습니까?"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단지 내 상가를 관리하는 회장님이라는 분이 계셨고, 이 분은 아파트 입주관리위원회까지 맡고 계시는 한마디로 동네 터줏대감 느낌이었다.

이 회장님은 이곳 단지 내 상가 3층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계셨고, 몇 십 년째 아파트와 단지상가 전체의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 계신 분이라 듣기로 판단은 평범한 분이 아닌 것 같았다.

1층 상가가 매도되었고, 그 매수자는 빨래방을 오픈할 거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난리가 났다는 거였다.

이 상가는 상가규약상 동종업계가 들어와서 영업을 할 수 없다는 항목이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민사소송을 하겠다는 내용을 부동산 아주머니를 통해 전달한 것이었다.

부동산 아주머니는 나에게 두 가지 계약을 동시에 진행한 장본인이고 보니 마음이 불편해 이 일을 책임지고 해결하시려 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첫 사업자를 도와주시려 손발 벗고 나서고 계신듯 든든해 보였다.

나 대신 내용이 보고된 빨래방 영업팀장의 말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와 계약 전 3층에 세탁소가 있는 거 본인도 이미 확인했고, 세탁소와 무인빨래방은 유사업종이지 동종업계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전혀 문제 될 부분이 없으며, 오히려 서울경기 지방에서는 세탁소와 무인빨래방이 윈윈 역할을 해서 빨래를 돌리고, 크리닉섬유는 맡기고 가시는데 그분 말씀 무시하시고 진행하셔도 된다는 답변을 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업장을 드나들며 관리를 해야 하는 사람은 나였고, 동네의 아파트 단지상가에 입점하는데, 동네 터줏대감의 입질이 겁이 나고 시작부터 그런 분을 적으로 두고 영업을 시작하라는 건 창업리스크를 두배로 떠안고 가는 느낌이었다.

월세가 들어가지 않아서 리스크가 낮으니 시작해 보겠다는 빨래방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으니, 빨래방창업은 계약을 취소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도덕적 윤리적 책임에 따른 개인적 사정일 뿐 입점을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계약취소가 안된다는 말만 도돌이표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상가를 매도한 사람은 상가규약을 명시하지 않은 죄, 물론 유사업종은 무관하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유사업종이 몇 번이나 못 들어오고 계약이 성사되지 못한 경우들이 많았었던 부분들을 잘 알면서도 매수인에게 언급하지 않은 대가로 부동산 소장님은 매도자에게도 책임을 일부 묻고자 하셨다.

그렇게 꼬이고 꼬여 있는 상황에 모든 문서의 주인공은 '나'였고, 결국 내가 해결해야만 했다.


남편이 터줏대감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동종업종이 아닌 유사업종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있는 상황과 앞으로 임차인을 들여야 하는 상가주인 입장에서도 이건 명백한 문제제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카페에서 베이커리 팔면 빵집은 못 들어오게 되고 겹쳐서 파는 것들이 다 막힌다는 말인데 이건 상가잔금 치기 전에도 확실히 짚어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터줏대감의 당당하면 안 되는 당당함에 맞서 싸우고도 싶었지만 동네장사로 새로운 시작을 진행하는데 누군가의 훼방을 예상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컸다.

자책모드에 사로잡혀 남편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

.

.

마이클 싱어의 ‘될 일은 된다’라는 책 구절이 떠 올랐다.

“삶이 나보다 더 잘 안다. 나는 다만 그 흐름을 허락할 뿐이다.”

애쓰지 말고, 내버려 두기.
무책임한 방치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흐름 앞에서 억지로 방향을 바꾸려 애쓰지 않음이었다.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내 안의 평정을 지키며, 그 흐름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흘려보내야 할 것들은 담담히 놓아주는 마음.


부동산 계약이 얽히고, 여러 사람의 말들이 오가고,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필요한 건 ‘이 또한 과정이다’라고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책 속의 지혜를 빌려 더 이상 감정소모를 하지 않기로했다.





keyword
이전 03화마흔에 되짚어보는 일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