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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 기억을 던지다

의식 너머의 기억은 세대를 건너 흐른다

by The Answer

프롤로그


푸른 피의 에이스

일명 푸피에

현재 삼성의 푸피에는

단연 의심할 여지없이

원태인.


그는 2005년 당시 5살의 나이로 야구 신동이란

타이틀로 TV 출현할 정도로 유명했고,

그의 아버지와 형도 야구선수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야구를 접했다.

그렇게 경북고에 진학하여 좋은 성적을 보이며

잘 성장한 원태인.

그는 2019년 크보 신인드래프트에서

1차에서 당당히 삼성의 지명을 받았다.

로컬 보이로써 유명세를 타던 그가 진짜 삼성에 입단한 것.

광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발탁되는 영광을 얻었고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우리의 푸피에는 지금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고 있다.


한편, 삼성의 푸피에 계보를 과거로부터 따져보면,

가장 먼저 김시진 선수.

포항 출신으로 대구상고(현 상원고)에서 한양대로 진학한 후

삼성에서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뛰었다.

이후 1992년 롯데에서 은퇴하였다.

다음은 김상엽 선수.

대구 출신으로 대구고를 나왔고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삼성에서 선수 생활한 후 엘지로 이적하여 2002년 은퇴하였다.

다음은 이태일 선수.

경주 출신으로 영남대 진학 후 삼성에 입단하여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특히 이태일 선수는 1990년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바 있다.

다음은

.

.

.

본격적으로

"푸른 피의 에이스"란 애칭이 붙은

진정한 푸피에 1기

바로

배영수다.




동명이인


가을은 삼성 유니폼 구입 후 누구의 이름과 백넘버를

마킹할지 고민했다.

첫 마킹이라 의미 있는 선수로 새기고 싶었던 것.

이건 마치 아들의 그것을 고민한 것보다

더 깊은 고민이었다.

어린 시절의 영웅 22번 이만수?

청년 시절의 영우 36번 이승엽?

은퇴 경기에도 전력질주한 10번 양준혁?

삼성 왕조에서 멋진 활약을 하던

현재의 삼성 타격 코치인 33번 박한이?

그라운드의 살구꽃 계보를 잇는 7번 김상수?

아님 가을이 농구하던 시절 좋아했던 번호를 단 5번 김한수?

시험에서나

현실에서나

선택지가 많은 질문은

답하기가

무척 어렵다...


거듭된 고민 끝에 불쑥 떠오른 세 글자.

25번 배영수.

가을 자신도 갑작스럽게 그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

다소 의아했지만

그의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던 바.

하지만

기억 저편에서 그의 이름이 팝업처럼 툭!

튀어나온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을의 기억과 마음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로 향했다.

허나 가을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는 점.

단지 가을의 이름을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는,

그리고

살아생전에 가을을 무척이나 예뻐했다는 점을

제외하곤

가을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희미할 뿐이었다.

다만, 다행인 건,

몇 년 전 가을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옛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했다는 것.

사진 속 할아버지는

마른 체형에

입이 살짝 삐딱한 모습.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 들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가을은 난생처음 뵙지만

낯설지 않은 그의 모습.

가을을 보고 있는 듯한

눈빛과 흐뭇한 표정

삐딱한 입이지만

화가 나 보이지 않은,

온화함이 묻어 있는

모습.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가을은 그 자신이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음을

몹시 아쉬워했다.

아들에게만큼은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기 위해

자주 부모님이 계신 경북 의성으로 향했다.

왕복 6시간이 넘는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을의 아들도 이제

그 시간과 거리가 익숙하다.

힘들다고 보채지도, 투정 부리지도 않는다.

가을의 아들에게 있어

할아버지와의 관계는

왕복 6시간이란 물리적 거리를

뛰어 넘어서는

끈끈했던 것이다.


가을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손자를 무척 아낀다는 점과 함께

그 사랑만큼 담배에 대한 애정도 깊다는 점.

가을의 아들에게 담배의 그윽한 냄새는

할아버지의 체취이자

추억이 되었다.

부전자전

가을의 할아버지도

갓난아기 가을을 안고 있어도

담배를 손에서, 입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니

결국 가을은 아들과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아들의 할아버지 모습


그의 할아버지와의 동명이인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에도 살아 있는 레전드

배영수.

그래서일까.

푸피에 1기인 그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가을은 유니폼에

그의 이름과 백넘버 25번을 마킹했다.

할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그를

새긴 것이다.




배영수는 1981년생으로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다소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반드시 야구로 성공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있던

그는 누구보다 연습에 매진했었다.

최초 포지션인 유격수에서 투수로 전향하며 적응기가

필요했지만

그는 특유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했던 것.

이윽고 1999년 세기말에서 열린

2000년 크보 신인드래프트.

삼성은 1차 지명으로 모든 이들의 예상과 달리

경북고 우투수 배영수를 지명한다.

이 당시 배영수는 한양대에서도 러브콜을 받았지만

경북고 선배였던 이승엽의 설득에

결국 삼성행을 택했다.

그리고 삼성은 그의 잠재력과 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고졸 신인 역대 최고 계약금인

2억 5천만원을 제시하게 이른다.


가을은 그의 이력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경력을 지닌 선수들은

무수히 많기에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고졸 신인"정도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

이후 2004년 17승 2패 평균 자책점 2.61로

다승왕과 승률 1위,

당해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아쉽게 놓쳤지만

노히트 노런도 가능한 좋은 선수정도만

인식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가을이 배영수를 특별히 애정하는 이유는 물론 할아버지의 동명이인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2006년 시즌부터 보여준 그의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을은 2003년 11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2년 동안 군 생활을 했었기에

삼성의 우승과 배영수의 활약은 큰 관심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다.

또한, 군 제대 후 치열하게 대학 생활에 적응해야 했던 가을은 남보다 너무 부족했던 학업과

급격히 기울어진 가정 형편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랬기에 2006년 시즌의 야구는 여유로운 이들의 즐길거리로만 여길 뿐 큰 관심을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한 살 터울인 배영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2006년 시즌 막바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진통제를 맞아 가며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헌신했다는 사실 때문.

가을은 본인도 농구를 하며 수많은 부상을 당했고 이를 이겨내며, 부상을 숨기기까지 하면서 경기에 출전했던 그의 경험이 배영수의 상황과 오버랩되며

그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했던 것.


배영수는 이후 2007~2009년까지

부상 회복기와 시즌 적응기를 보냈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2010년부터는 부활의 신호탄을 올렸다.

강한 속구의 공격적인 피칭과 더불어 슬라이더, 포크볼 등의 날카로운 변화구도 능히 구사함으로써

원조 '푸른 피의 에이스'의 명성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는 SK 와이번스에게 우승을 내줬지만

배영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3년 간의 침체기와 슬럼프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분명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011~2014년까지 4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란 금자탑을 세운 "삼성 왕조"에서 그는 나름의 위치를 찾으며 기교파로서 타자들을 상대하였다.

2013년 13승으로 공동 다승왕의 타이들을, 2014년 통산 120승의 업적을 남기며 삼성 우승에 기여했던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5년부터는 그가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구단측에서는 FA자격을 획득한 그를 "푸른 피의 에이스"로서 대우를 해주지 않았던 듯하다.

아주 세부적인 계약 과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대우가 미흡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삼성은 "푸른 피의 에이스"를 잃고(?) 맞이한 2015년 시즌.

알다시피 구단은 몇몇의 선수들이 그릇된 행위로 큰 위기를 봉착했고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선수단들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팬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삼성은 두산에게 KS의 우승을 내줘야만 했다.

이후 삼성의 성적은 곤두박질치며 삼성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다음은 2016부터의 삼성의 시즌별 성적이다.


2016년 9위 65승 1무 78패 승률 0.454

/ 한화 7위 66승 3무 75패 승률 0.468

2017년 9위 55승 5무 84패 승률 0.396

/ 한화 8위 61승 2무 81패 승률 0.430

2018년 6위 68승 4무 72패 승률 0.486

/ 한화 3위 77승 0무 67패 승률 0.535

2019년 8위 60승 1무 83패 승률 0.420

/ 두산 1위 88승 1무 55패 승률 0.615

정규-KS 통합 우승 / 은퇴

2020년 8위 64승 5무 75패 승률 0.460

2021년 3위 76승 9무 59패 승률 0.563

2022년 7위 66승 2무 76패 승률 0.465

2023년 8위 61승 1무 82패 승률 0.427

2024년 2위 78승 2무 64패 승률 0.549

2025년 4위 74승 2무 68패 승률 0.521


"푸피에" 배영수가 집을 떠나 한화, 두산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2016~2019년까지 총 4년 동안

그의 고향 팀 성적은

바닥 없는 곳으로의 추락 그 자체였다.

마치 "푸피에의 저주"처럼

그는 이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나 없이는 역시!!’라는 통쾌함?

아니면

멀리서 불난 집 바라보며 드는 안타까움?

아님

전혀 미련이 없었기에

그저 무념무상?



그의 은퇴 이후에도 삼성은 2021년 반짝 3위란 좋은 성적을 보였지만 왕조의 DNA가 되살아난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배영수는 코치로서도 삼성과의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채 두산, 롯데를 거쳐

2025년부터는 SSG에서 투수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올해 준플에서 친정팀과 마주한

그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지…

가을은 그의 인터뷰를 요청을 하고 싶었다.




가을의 기억 서랍에서 할아버지를 꺼내준

배영수

그는 가을의 무의식 저편에 넣어둔 할아버지를

소환시켰고,

가을의 아들이 그의 할아버지와의

추억 쌓기가

얼마나 소중한 지 일깨웠다.

가을은

야구가 그저 스포츠로만,

즐길거리로만

머물지 않음을,


가을에게

야구란

삶의 소중한 무엇을,

그 무엇을

또렷하게,

분명하게,

몸과 마음에

각인시켜 주는

도장이었다.




[ 가을의 한 줄 정리 ]


그의 그윽한 향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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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