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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가을의 야구는

전학생을 품은 주먹 야구

by The Answer

주먹야구

김요아킴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5차전

벼랑 끝으로 몰린 승부

감독들의 사인이 현란하다

서로의 점수를 훔치기 위한 복화술이

화면 가득 재생되고 있다


됐나?

됐다...

가난한 흙먼지를 뚫고

좁은 공터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물컹한 고무공이 날아오른다

가진 거라곤

움켜쥔 주먹과

내달려야 할 허벅지의

여물지 못한 힘줄

내 힘으로 친 만큼

밟을 수 있는 베이스처럼

서로 꼼수를 부리지 않는

조막손들의 최소한 룰




프롤로그-전학 가는 날


때는 1993년

12월의 어느 겨울날,

국민학교 시절

한창 농구에 빠진 가을은

결국 농구선수의 길을 걷기로 했다.

이 결심은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

버스로 1시간 거리인 학교로의

전학을 의미했다.

이 당시

가을은

1시간이 1분으로

느껴질 만큼

농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이 물리적 거리와 시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94년 3월,

드디어 전학 가는 날,

가을은

막상 5년 간 다녔던 학교와

그 이상 많은 시간을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과

이별을 하려니

발길을 뗄 수 없어

한참을 교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우리 집과도 같았던

학교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다

마음 속에서 울컥거림이

전해졌다.



이 감정은 실로 13살 가을이 감당하기엔

큰 슬픔이었다.

비록 몸은 그들과 같은 성당동에 있지만

마음과 열정, 무엇보다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가을은

그들과의 떨어짐이 뭇매 아쉬워

결국

아빠의 차 안에서 슬피 울어댔다.

눈물이 주룩주룩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은

전학 갈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을은

3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그때의 감정이

오롯이 떠오른다.

토닥거리며 위로하는 엄마,

아들의 울음소리를 숨죽이며

듣고 견디며

그곳으로까지 운전대를 잡은 아빠.

가을의 기억에

1994년 3월의

전학 가던 날은

유난히도

추웠다.




자랑꾸러기 완규


6학년 1반.

가을이 배정받은 학급이다.

낯선 환경에 잔뜩 얼어 있던 그였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선생님이 정해준 짝꿍 옆에 앉았다.

가을의 첫 짝꿍은

완규였다.


완규는 가을이 전학오기 전까지

학교에서 가장 키가 크고

덩치도 가장 컸으며

힘도 가장 센 친구였다.

흔한 말로

짱.

그런 그에게

가을의 전학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완규는

가을이 전학 온 첫날부터

무거운 것을 들어 보이며 힘 자랑,

본인 친구들을 줄줄이 소개하며 인맥 자랑,

여학생들을 몽땅 데리고 와서는 인기 자랑

자랑! 자랑! 자랑!

퍼레이드를 선보였다.

그야말로

그는

요즘 말로

핵인싸.

그 자체였다.

완규는

가을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전학생을 압도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것.


근데,

가을은 의외로 온순했다.

힘 자랑엔 별 관심이 없었다.

인맥과 인기 자랑에는 오히려

멋지다고 그를 치켜세웠다.

그의 자랑 퍼레이드는

가을을 방긋 웃게 만들었고

금방

새로운 학교에 적응할 것 같은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가을은 완규의 으스대는 모습이 퍽 좋았는지

그와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같이

떡볶이를 먹고

자주

오락실을 가고

그리고

.

.

.

함께

주먹 야구도 했다.





주먹으로 야구를?


가을은

주먹 야구가 생소했다.

그의 입장에서

야구 같지 않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널찍한 동네 골목이 있었고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체의 수순을 밟았지만

"성당동 사자들"도 있었고.

그래서

굳이 손으로 말랑공을

칠 이유가 없었던 터라

주먹 야구는 그에게 너무나 생경했다.


가을은

이곳에서 며칠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전학 온 학교에서는

온전한 야구를 할 수 없었다.

운동장이 매우 좁았기 때문.

홈런이라도 치가라도 하면

왕복 6차선 도로로 공을 날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주먹 야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주먹 야구의 성지인

이곳에서는

완규가 4번 타자이자

감독이자 코치였다.

그야말로

삼성의 이만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완규는 이만수를 몰랐다.

야구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저 주먹 야구만이 전부였던 것.

가을은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를 전파했다.

리틀야구단 유니폼과 모자

배트, 글러브를

보여주며.

마치 항일독립운동 시기

야구를 소개해준 선교사처럼.


주먹 야구의 공은

무척 말랑거렸다.

혹시나 공이 터질까 싶어

친구들은

공 한 개씩 준비해야만 했다.

없으면 빌리기도 했다.

주먹 야구 경기에서는

당연히

글러브는 없다.

1루, 2루, 3루, 홈 베이스,

파울라인은 물주전자로 그렸다.

경기 도중 물이 마르면

잠시 중단 후 물을 다시 뿌렸다.

홈런은

맞은편 건물 앞 펜스를 넘어야만 했다.


흙바닥인

운동장에서는

우리들은

프로선수 못지않은

다이빙 캐치와

슬라이딩이

난무했다.

그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로 씻으면 그만.

경기 중

가끔씩 터지는 병살은

가을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가을은 본인의 친 만큼

달릴 수 있는

주먹 야구의 매력에

빠져 버렸다.

낯선 환경에서

어색한 사이를 둘도 없는

친구로 만들어 준

주먹 야구는

가을에게

선물과 같았다.


한편,

가을은 농구선수가 되기 위해

이곳으로 왔지만,

농구보다

주먹 야구의

추억이 더 깊다.





각자의 삶으로


매일같이 주먹 야구를 하며

친구들과 어울렸던 그 짧은 시절은

쏜살같이 지나고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그들과는 멀어져 갔다.

몇몇 친구들은 같은 학교로 진학했지만

완규는 아니었다.

완규는 가을과 마찬가지로 학교와 집이 멀었다.

그래서 중, 고등학교를 모두 집 근처로 갔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그 시절,

완규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친구들에게 간간히

듣게 되는 그의 소식이

전부였다.

그렇게 완규는 헤어짐을 맞았다.



1998년,

고등학교 1학년

드디어 겜방(PC방)이 생겼다.

사이버공간이 지하에 마련된 것이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로 대중화에

성공한 겜방은

모든 중고등학생들의 친목 도모,

취미 및 여가활동의 공간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세이클럽, 스카이러브

그리고

다모임이 대세로 자리매김하였다.

여전히 휴대폰이

고등학생에게는 사치품으로 인식하던 그때,

겜방에서의

다모임은

국민학교 동창들과 연락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도 역시 다모임에서 동창회를 만들었다.

가을이 짝사랑했던 여학생들의 이름을 보며

혼자서 설렜고

재회의 순간을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주 만날 것만 같았던 초반 분위기와는 달리

오프라인 만남이 성사되긴 쉽지 않았다.

각자의 스케줄이 있었고

이사를 간 친구들도 더러 있었으며

무엇보다

가을과 그의 친구들은

고등학생이었다.

고1,

고2,

고3

.

.

.

그래도

가을과 친구들은 두어 번 정도만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그 자리엔

완규는 오지 않았다.


고3이 되고

대학생이 된 가을은

고향을 떠나

대학생활을 위해 타지로 떠났고

그렇게

국민학교 시절의 친구들과는

몸도 멀어져만 갔다.

주먹 야구가 이어준

전학생 가을과 친구들의 인연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읽으면 가을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가을의 한 줄 정리 ]


주먹 야구는 1994년으로의 시간여행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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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