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에서 운동장까지, 마음이 오간다
가을이 근무하는 교무실에서는 이번 시즌 내내 야구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교무실에는 기아, 한화, 케이티, 엘지 그리고 삼성 팬이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
정규 시즌 동안 기아와 케이티, 삼성의 순위 경쟁 탓에
가을의 교무실 내 선생님들은 서로 웃고 울었다.
“뭐야~쌤! 안현민은 왜 거기서 홈런을 친 거야!? 좀 봐줘요~”
“역시 삼성은 불펜이 약해~”
“최형우는 친정팀한데 왜 그러는 건데!?"
"그러게. 김재윤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가 봐~”
본인 팀이 이긴 날이면 다음날 출근해서 교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요란스럽다.
"아이고~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미안해서 어쩌지!?ㅋㅋ"
그 와중에 한화와 엘지 팬 선생님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몸을 의자에 기댄 채 한결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두 팀 간의 1, 2위 다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일었다.
한화팬 A는
한화가 간발의 차로 1위로 유지할 적에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만 얼굴은 항상 싱글벙글.
엘지가 앞설 땐 웃으며 말하지만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는 모양새.
반면, 엘지팬 B는
엘지가 1위를 달리고 있을 땐
“엘지 몰라…저러다 미끄러질 수 있어!" 라며 미덥지 않은 듯 말하지만
내심 엘지의 승승장구를 즐겼고,
반대의 경우에는 “내 그럴 줄 알았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정규시즌 막바지 포스트시즌 진출팀의 윤곽이 드러났고
야구 이야기의 중심이 자연스레 가을을 비롯하여 A, B선생님들로 무게추가 옮겨졌다.
삼성이 와일드카드 결정전, 준플 업셋까지 상승세를 탈 때,
그들은 삼성의 경기에 관심을 보였고 가을보다 먼저 경기 리뷰를 했다.
“원태인 멋지더라!”
“이재현은 뭐야. 1회 초 선두타자가 홈런을 쳐!? 대박!”
“드디어 디아즈 홈런이 터졌네! 이렇게 치고 올라오면 곤란한데!”
가을은 이들과의 대화가 즐거웠다.
경기가 있던 다음날에는 빨리 야구 얘기가 하고 싶어 출근을 하고 싶다는 이상한 마음까지 들 정도.
야구 이야기는 교육과 학생, 업무 얘기가 난무하는 교무실에
신선한 바람이면서도 삶의 활력이었다.
야구로 서로 대화의 물꼬를 틀었고 깊은 이야기로까지 이어져 상대방을
더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그런 것이었다.
가을이 근무하는 학교 구성원들은 가을이 무슨 팀을 좋아하고 응원하는지 모두가 안다.
체육대회 당일에는 삼성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가방에는 양준혁 선수 은퇴경기 기념 손수건을 매달며
“최강삼성”이 새겨진 수건을 지니고 다니면서
교무실 책상에는 이승엽의 인형과 삼성 선수들의 띠부씰로 도배가 되어 있으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다.
그중, 띠부씰은 가을이 직접 모은 것이 아니라 띠부씰을 모으는 학생들이 건네준 것.
본인의 팀이 아닌 삼성 선수들이 나오면 버리지 않고 가을에게 선물을 줬다.
특히 기아 팬인 학생은 무슨 빵을 그렇게 많이 사 먹는지 거의 매일 가을을 볼 때마다 띠부씰을 선물했다.
덕분에 구자욱을 비롯하여 김영웅, 원태인, 이재현 등등 웬만한 삼성 선수들은 다 모을 수 있었지만.
"(씨익 웃으며) 쌤~어제 삼성 미쳤대요! 작년엔 우리한데 힘도 못썼는데!ㅋㅋ"
"야~작년엔 1차전 때 비가 와서 말렸던 거야! 김헌곤이 혼런때렸는데...서스펜디드가 웬 말이냐고!"
사실, 기아 팬 C는 그렇게 활발한 학생이 아니다. 체육수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가을이 어렵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가을은 야구 덕분에 C와 친해졌다.
매일 수업 시간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기아와 삼성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한 번은 가을이 그와 하이파이브를 한 이후로 삼성이 연승을 이어갔다.
그 이후를 그를 볼 때마다 하이파이브였다. 마치 부적과도 같은.
가을은 안다. 선수들은 이긴 날이 입었던, 혹은 행동했던 것들을 질 때까지 한다.
미신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승리가 간절하기에 나타나는 병리 현상이라고나 할까.
"(아무 말없이 손을 내밀며) 해줘~"
"뭐예요. 이런다고 이겨요?"
"그래도 기운이 좋아!!"
가을은 가을 야구가 끝나고도 하이파이브는 계속한다. 2026년 우승 기원을 위해서. 그도 싫지 않은 눈치다. 그는 가끔씩 하이파이브를 안 해주기도 한다. 그래도 가을은 계속 손을 내민다.
그럼 못 이긴 척 손을 쳐준다.
가을은 C와의 야구로 이어진 관계가 마냥 좋다.
이 글을 쓴 날에도 그랬다.
또 한 명이 있다. D는 키움 팬이다. 알다시피 키움은 올해는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나 할까.
때는 상반기 마지막 즈음이었다. 삼성은 키움에게 치명적인 스윕패를 당했다.
그때부터 가을은 D에게 떼를 쓴다.
“한 번만 봐주라. 너넨 신인 드래프트에서 좋은 선수 뽑을 거잖아!
올해 키움은 리빌딩 시즌이잖아.
우리 좀 올라가자!"
그에게 있어 살짝 자극적인 멘트지만 그는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아니나 다를까. 키움은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박석민 선수의 아들 박준현을 지명했다.
키움은 송성문을 중심으로 신예 선수들로 내년이 기대되는 팀이 되었다.
"쌤~좋으시겠어요! 삼성은 요즘 잘 나가던데...
어제 고척에 직관 갔었는데...
송성문도 딴 데로 가면 어떡해요...
옆 친구들이 팀을 갈아타라는 얘기에 그는 발끈했다.
그건 예의가 아니지! 한번 정한 팀은 죽을 때까지...
근데... 올해는 너무 하긴 해..
이 야구의 인연 때문일까. 그는 체육수업에도 적극적이었다.
내성적인 그였기에 그의 적극적인 모습이 가을에겐 큰 행복이었다.
그 역시 가을에게 가끔씩 띠부씰을 내밀었다.
가을은 이미 갖고 있는 선수지만 고맙다는 인사로 교무실 벽면에 그의 선물을 전시하였다.
가을이 한창인 어느 오후,
가을은 학생들이 하교한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퉁! 퉁!
구령대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가을은 조심스레 소리가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고3 수험생 E가 혼자서 벽을 향해 공을 던지고 있었다.
가을은 순간, 어릴 적 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캐치볼을 함께 할 친구가 없어서 벽을 친구 삼아 공 던지기에 열중이었던.
가을은 그가 안쓰럽기도 했고 동시에 캐치볼도 하고 싶기도 했다.
그에게 캐치볼을 제안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아뿔싸!
가을에겐 글러브가 없었다.
다행히 E에게는 여분의 글러브가 있었다. 그와 함께 30여분 캐치볼을 했다.
"플라이 볼"
"바운드"
"릴리스 포인트가 너무 앞이야! 조금 일찍 던져!"
"공을 누르듯이 던져야 회전이 빨라져!"
"좋아! 많이 좋아졌네!"
E와의 캐치볼은 아들과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공의 세기며, 거리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가을은 이 일을 계기로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그와 캐치볼을 종종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출근부터 약간의 설렘을 안고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다.
가끔씩 E가 운동장에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깜박했단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아쉬웠다.
이후엔 E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가을은 E와 많은 대화가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를 우연히 케이티 위즈 파크(수원)에서 만났다.
E도 삼성 팬이었던 것.
그는 아버지와 함께 직관했고 난 아들과 직관했었다.
마치 우리의 미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사실, 가을은 중학교 이후 아버지와 야구장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가 부러웠다.
훌쩍 커버린 아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는 것이.
가을은 아들과의 대화와 소통, 공감 거리로써 야구가 좋은 매개가 된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독립서점에 방문한 적이 있다.
아들은 <다시 그리는 한국프로야구사>를 집어 들고는 연신 재밌게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가을은 그 책을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아들은 너무 기뻐하며 집으로 내내 책을 읽었다.
이만수, 이승엽, 양준혁 등등 삼성의 레전드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주었다.
"아빠! 이승엽이 아시아 신기록 깰 때 진짜 잠자리채가 있었어??"
"이만수가 포수였어? 난 투수인 줄 알았거든!"
"아빠! 알아? 양준혁은 만세 타법을 했다는 거! 이상하지!?"
연신 야구 이야기를 쏟아내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가을이었다.
사람을 잇는 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