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든 아이이든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보면 조금은 느린 학생을 만나게 된다. 개인의 가치관이 선생님으로서의 책임감(또는 사명감)을 만나게 되면 교육관이 된다고 믿는데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 현장에서 그렇게 빡세지(입시에서 벗어나 있는) 않아도 되는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학생들이 커버가 가능했고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믿어왔다. 최근에 시작한 어른 대상 글쓰기 수업. 두번째 시간에 약간 어눌한 분이 참여했다. 약간의 대화와 실습을 통해 수강생들도 모두 어떤 차이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끽해야 2시간 수업이고 서툴어도 그에 맞는 대응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실제로 신경을 써서 진행했다) 그 수강생으로 인해 앞으로의 수업에 나의 에너지를 더 많이 써야 함이 예측되고 걱정도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분을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업이 끝날때쯤 담당자분이 ‘경계성 지능인’이라고 말씀해주셨고, 그 분이 소외되지 않게 잘 이끌어가야겠다고 약간의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 분의 존재와 부재에 따른 이중적인? 마음을 확인하고 잘 감추기 위한 다짐이기도 했다. 평범한 나로서의 ‘한숨섞인’ 마음과 선생님으로서의 ‘다 같은 학생‘이라는 마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튀어나왔지만 결론은 역할에 있어서의 책임감이 이겼기에 걱정이 오래가진 않았다. 세번째 수업 시간. 그 분은 오지 않았고 담당자님께 수업 참여가 어렵다고 연락이 왔다고 했다. 또 불쑥 튀어나온 이중적인 마음. 에너지 쓸 일이 줄었다와 편하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되어주지 못한 미안함. 두번째 시간에 커리큘럼대로 잘 따라왔지만 본인이 느꼈을 위화감은 우리 중 누가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앞으로의 수업을 따라가는 게 힘들거라 분위기만으로 전달된 것이 아닐까. 수업을 들을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지만 결국 직접 느끼고만 ’누구에게나‘로부터 소외되는 경험. 그렇다면 그 분들을 위한 수업을 따로 마련해서 진행해야될까? 하지만 그러한 교육 환경이 진짜 그분들을 위한 일일까? 교육에서 효율을 우선시할 때 사람에 대한 존중은 옅어진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수업을 받는 건 배움이기도 하지만 공존이기도 하고 배려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그 분의 ’다름‘을 느꼈을 때 이중적인 마음이 들어 뜨끔했고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 분이 세번째 수업에도 참여했으면 어땠을까. 조금 부족해도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공개적으로는 말고) 있었을 것 같은데 그 분이나 나나 아직은 사회적 관성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 같다. 담당자님으로부터 ‘그 분이 안 올 것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순간 ‘수업에 오시라‘고 다시 연락드려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고, 그 분의 선택으로 원활한(상대적으로) 수업이 되겠다는 이기적인 마음도 한 몫했다. 수업에 참여하셨다면 개개인의 특성과 수준에 맞게 이끌었겠지만 내가 가진 교육관은 수업에 참여하느냐의 여부로 발현이 되므로 불참 의사를 밝힌 이상 나의 역할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자발적 탈락 혹은 자발적 소외가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선생으로서의 소양은 이정도지만 선생님의 소양이나 가치관을 들먹이지 않을 정도의 안전한 시스템과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사회적 약자들이 학습된 소외를 경험하지 않기를. 다음에 비슷한 분을 만나게 된다면 다음 시간에 꼭 오시라고 말하리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