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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Apr 20. 2021

돈도 안 되는 번역을 왜 하냐고요?

현직 번역 작가들의 저서. 번역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번역료가 짠데 왜 번역을 하는 거예요?"


얼마 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번역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는데 실제 번역가의 수입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다 나온 말이었다. 그 질문을 듣고 내가 왜 번역을 계속하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번역은 가성비가 떨어지는 대표적인 직업이다. 일의 어려움에 비해 그만큼 대접을 받지 못한다. 딱 정해진 직업명도 없다. 번역하는 사람, 번역해요 등의 말로 대체된다. 번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만연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번역은 진입장벽이 낮다. 영어 좀 하거나 외국에서 살다오면 별도의 교육을 받지 않고도 시작할 수 있다.



번역이 평가절하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낮은 요율이다. 시장가가 상상 이상으로 낮게 형성돼 있다. 분야별로 차이가 있긴 해도 혹자는 이보다 인형 눈알 붙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우스개 소리를 할 정도다. 참고로 내가 대학 때 받았던 번역료와 지금 요율이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앞으로의 개선도 요원해 보인다.



출판번역가 포함 무려 6개 직업을 갖고 있는 6잡러 서메리 작가는 신사임당 채널에 출연해서 번역으로 빌딩 세운 사람 못 봤다는 말로 낮은 번역료를 에둘러 꼬집었다. 굉장히 순화된 표현이다. 번역료로 빌딩을 세우기는커녕 생활비가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유명 출판번역가 김택규 작가는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위치임에도 번역만으로는 빠듯해서 윤문 아르바이트를 병행한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들은 번역을 계속한다. 왜일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번역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메리 작가는 6개 직업 중 가장 사랑하는 직업으로 요즘 최고 인기인 유튜버를 뒤로 하고 번역 작가를 선택했다. 그 이유로 저자가 고통스럽게 창작한 작품에 함께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고, 그런 작품을 읽으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김택규 작가는 자신의 저서 <번역가 K가 사는 법> 서문에서 ‘기업인은 돈을 추구하지만 글쟁이는 오직 자신이 사멸한 뒤에도 자기가 쓴 글이 남아 읽히기만을 바란다’는 말로 자신이 번역을 계속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번역의 가치를 인정한 그들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대학 때부터 번역을 해 왔다. 중간에 쉰 기간이 꽤 되지만 망설임 없이 다시 번역으로 돌아갔다. 낮은 요율을 걷어내면 번역의 장점은 굉장히 많다. 번역가는 요즘 누구나 꿈꾸는 디지털노마드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외국에서도 일할 수 있다. 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미리 살고 있는 직업이다. 얼굴 한번 보지 않고도 작업이 가능하다. 나 역시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 담당자의 얼굴을 못 본 건 물론 목소리도 들어본 적 없다. 하지만 일하는 데는 전혀 지장 없다. 메일과 메신저를 이용해 무리 없이 일감을 의뢰받고 계약서를 진행한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서 육아로 경단녀가 될 위험도 적다. 오히려 집안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엄마에게 더욱 적합한 일이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은퇴해야 하는 직장과 달리 정년이 없다. 능력만 있으면 연차가 쌓일수록 몸값을 인정받고 늙어서도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나만의 이유가 있다. 나는 번역을 좋아한다.



마감 맞추느라 골머리를 싸매다가도 원고를 송부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외국어를 읽을 때 느껴지는 지적 쾌감과 내가 고른 단어들로 채워지는 문장을 보는 기분은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원작자의 숨결을 필터링 없이 받아들여 오직 나라는 사람을 통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하는 작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다. 돈을 훨씬 많이 받고 다녔던 대기업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만족감이다.



예전에 모 회사에서 해외 토픽을 번역한 적 있었다. 토픽감을 고르기 위해 눈이 빨개지도록 인터넷을 뒤졌다. 주당 다섯 꼭지가 필요하면 열 배 이상 소재를 찾아서 보고했다. 선정된 원문은 번역부터 제출까지 무수히 교정했다. 함께 일한 선배가 보다 못해 '돈 받은 만큼만 일해'라고 말할 정도였다. 내게 번역은 그런 존재다.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돈이 되지 않아도 그냥 내가 좋아서 하고 싶은 일. 나는 번역의 가치를 거기에 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번역의 '대체 불가' 값어치다.


그래서 나는 '돈도 안 되는' 번역을 앞으로도 계속 할 거다.




다른 길을 가지 않고 이 길을 묵묵히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저에게 연애와도 같았으니까요.
- 김소희 <중국어 번역가로 산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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