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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Apr 26. 2021

칠순 우리 엄마는 야구선수

박찬호 선수


'철의 여인' 우리 엄마가 입원하셨다.



자식들 걱정할까 봐 병원 가는 걸 매번 숨기는 엄마의 입원 소식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형부가 아는 사람을 통해 병원을 소개하면서 엄마의 의도와 상관없이 '알려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원 소식이었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텐데 엄마가 입원하셨다니 충격이었다. 엄마는 일흔 나이에도 나보다 두 배 이상 쌩쌩하고 활력 넘치는 분이었다.



다급하게 전화하니 엄마가 웃으면서 받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어깨가 끊어졌어."



이건 무슨 소리인가. 어깨가 끊어지다니. 어리둥절하던 나는 그제야 몇 달 전부터 엄마가 어깨가 아프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중병은 아닌 것 같아 일단은 마음을 놓았다. 엄마의 밝은 목소리와 부위가 '어깨'라는 점이 나를 안심시켰다. 어깨는 왠지 생명을 위협하는 부위는 아닌 것 같았다. 한시름 놓은 나는 어쩌다 어깨가 '끊어진' 건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어깨의 뼈를 연결하는 조직들이 전부 닳아 없어져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어깨의 뼈끼리 연결하는 그 조직이 없으면 뼈와 뼈가 그대로 부딪혀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고 결국은 한쪽 팔을 아예 들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고 한다. 엄마는 어깨뼈들 사이에 조직을 잇는 수술을 하러 입원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의사가 했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엄마의 어깨 상태를 본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MRI와 엄마 얼굴을 연신 번갈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국가대표급 투수들 어깨 상태와 똑같은데요. 이 정도 어깨 상태가 되려면 야구선수여야 해요. 아니, 대체 어깨를 갖고 뭘 하신 거예요?"



실제로 엄마는 야구선수들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병원에 입원하셨다. 복도에는 유명 야구선수 사인이 담긴 액자가 즐비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칠순 할머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유명인사였다.



이 웃픈 상황 앞에서 나는 그만 코끝이 찡해졌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어엿한 아이 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내게 무거운 짐을 절대 못 들게 하신다. '짐은 힘이 아니라 요령으로 드는 것이다'가 엄마 평생의 모토였다. 터질 듯한 장바구니를 양손 가득 바리바리 들고 다니는 건 기본이고, 웬만한 짐은 돈 아낀다고 사람 안 쓰고 전부 엄마가 낑낑거리면서 이고 지고 날랐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무거운 짐 옮길 일이 정말 많았던 것 같다. 40kg도 채 안 나가는 가냘픈 몸으로 엄마가 평생 들어 나른 짐이 아마 이삿짐 트럭으로 수십, 아니 수백 트럭은 되지 않을까. 그러니 그 어깨가 남아날 리 없었다.




엄마의 어깨는 앞으로 1년 동안 재활을 열심히 하셔야 제대로 쓸 수 있다고 한다. 엄마는 깁스로 한쪽 어깨를 붙잡아 매고서야 남편과 자식들에게 무거운 걸 옮기도록 '허락해' 주셨다.



엊그제는 엄마 집에 오랜만에 반찬 몇 가지를 해다 드렸다. 하필 오른쪽 어깨가 그렇게 되는 바람에 살림이 불가능해지신 엄마와 요리 불가능러 아빠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엄마는 그 어깨를 하고서도 왼쪽 팔로 커다란 김치통에 이거 저거 담느라 분주하셨다.



"엄마, 제발 그만 좀 해. 그러니까 어깨가 끊어지지!"



이렇게 짜증을 부렸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엄마, 어깨가 끊어지는 것도 몰라서 미안해. 지난번 이불 짐 옮기는 건 내가 할 걸."



몇 달 전 막내딸 갖다 준다고 두꺼운 겨울 이불 여러 개를 혼자 옮기느라 마지막 남아 있던 엄마의 실낱 같은 어깨 조직이 끊어진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려왔다. 마음은 아픈데 말은 예쁘게 못 하는 나는 언제쯤 사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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