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키즈룸 카르텔

공동체 육아의 미덕

by 삽질

저희 아파트 단지에는 실내 키즈룸이 있습니다. 작은 키즈카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미끄럼틀, 방방처럼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시설이 있는 작은 공간이지요. 저희 부부는 3년 동안 아이를 가정보육했습니다. 아이가 기관에 가지 않으니 당연히 키즈룸은 저희 부부가 가장 애용했던 장소입니다. 한여름, 한겨울에 도무지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으면 키즈룸만 한 장소가 없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저희 부부에게 정말 달콤한 곳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부모님들이 키즈룸에 아이를 데리고 오십니다. 그러다 보니 제 아이 또래인 아이의 부모님들께 말도 걸고 육아 정보도 나누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더군요. 3년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꽤 많은 22년생 부모님들과 아는 사이가 됐습니다. 저희 부부는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지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부모님들과 관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반면에 다른 어머님들은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공고히 쌓아가며 깊은 관계를 맺어 가시더군요. 결국엔 언니 동생하는 관계로 발전하며 키즈룸 무리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런 무리들을 재미 삼아 카르텔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키즈룸에 들어가면 명확하게 갈려진 몇 개의 육아 카르텔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보통 자녀 또래에 맞춰서 무리가 형성되는데 저희 아이가 태어난 22년생만 보더라도 3,4개 정도의 카르텔로 나뉘어 있습니다. 사실 저희 부부는 어디에 속한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다행히도 한 카르텔의 어머님들과 키즈룸이나 놀이터에서 만나면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관계이지요. 저희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카르텔인 것 같습니다. 줄을 잘 섰습니다.

카르텔의 기세는 키즈룸 장악력에 있습니다. 우선 카르텔 멤버들이 키즈룸에 들어서면 한자리를 차지하고 과자파티를 시작합니다. 키즈룸 벽면에는 외부음식 반입금지라는 안내문이 큼지막히 박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갱단원들은 쉽게 무시해 버리죠. 구성원들이 하나씩 모여들면서 조금씩 대형이 커지면 대가족 야유회마냥 압도적인 분위기로 공간을 장악합니다. 가끔 이 기세에 눌려 키즈룸에 발을 못 들이거나 조용히 나가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저희 부부는 카르텔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것이죠.

무시무시한 명칭과는 다르게 사실 저희 부부는 이 카르텔이 참 고맙습니다. 카르텔을 통해서 최근에 사라진 이웃사촌, 육아공동체의 미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아를 하다 보면 한 아이에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부모가 오로지 혼자 아이를 키워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죠. 어린이집 하원 후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바로 놀이터로 향합니다. 자연스럽게 카르텔끼리 삼삼오오 모이며 아이도 부모도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육아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둘째가 있는 부모들은 무척 바쁩니다. 몸도 정신도 많이 지치죠. 카르텔 멤버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방치되는 둘째를 돌아가면서 안아주거나 돌봐줍니다.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 가야 하면 아이를 대신 맡아 주기도 하죠. 물이 떨어지면 물을 주기도 하고 휴지가 필요하면 휴지를 건네주기도 합니다. 마치 가족처럼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아이 입장에서도 카르텔의 존재는 좋습니다. 부모와 가깝게 지내는 어른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정감도 느끼고, 부모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모방학습을 합니다. 신기한 게 부모들끼리 친한 경우에 그 부모들의 자녀들도 사이가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카르텔에 소속되지 않고 주변을 겉도는 부모의 아이는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요. 부모의 관계가 곧 아이의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죠.

이래서 많은 어머님들께서 기어코 모임에 참여하거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나 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사실 저희 부부는 누군가와 억지로 만남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운이 좋겠도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죠. 아이를 위해 억지로 원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과정 자체가 아이에게도 좋을 테니까요. 그리고 부부사이의 관계가 다른 부모들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만 카르텔의 깍두기 멤버로서 공동체와 함께 육아하는 유익함을 경험해 보니 굳이 모임을 멀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끔 기를 쓰고 혼자서만 애를 키우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마치 무균실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 시려고 하죠. 본인만의 아집일 겁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 부부는 성격상 카르텔 깍두기로 있는 게 좋습니다. 보통 카르텔 멤버들은 함께 많은 활동을 하더군요. 키즈카페 가기, 수업 듣기, 야유회처럼 말 그대로 이웃사촌을 넘어서 공동 교육자가 되는 것이죠. 그 정도는 조금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냥 놀이터나 키즈룸에서 서로 안부를 전하고 아이를 함께 돌보는 정도가 저희에게는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이상으로 하면 너무 기가 빨릴 것 같네요. 대문자 I 부부의 한계입니다.

요즘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런 육아 카르텔의 존재가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게다가 카르텔 갱단원들 모두 친절하고 상식적입니다. 누구 하나 모난 사람을 찾기가 어렵죠. 집단에서 미친놈을 찾을 수 없다면 내가 미친놈이라던데... 혹시 제가 조커는 아니겠지요. 아니길 바랍니다. 오늘도 카르텔과 함께 즐거운 육아를 하러 떠나야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카르텔과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충성 충성.

keyword
삽질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110
이전 01화놀이터 침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