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운동 열심히 하면 생기는 (행복한)부작용

by 삽질

아이가 22년 2월에 태어나고 육아를 하면서 몸과 마음이 빠르게 지쳐갔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파트 헬스장에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작고 별 볼일 없는 헬스장이지만 저 같은 운동 좁밥에게는 LA 골드짐이 부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러닝머신이나 조금 뛰고 기구나 깔짝대는 수준이었습니다. 30분 정도 운동할 수 있는 체력이더군요. 그렇게 깔짝충으로 6개월을 하다 보니 체력도 조금 생기고 약간의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왕 운동 시작한 거 끝까지 해보자고요. 그리고 운이 좋으면 몸짱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목표는 일 년 뒤 여름에 양양 해수욕장에서 핫 대디로 데뷔하는 것이었습니다.


PT를 받지 않고 혼자 유튜브를 보면서 꾸역꾸역 해 나갔습니다. 예전에 운동을 조금 했던 경력이 있어서 혼자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의욕은 앞섰지만 생각보다 몸의 변화는 느렸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방학 때는 오전, 오후 하루 두 번 헬스장을 가기도 했습니다.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쌍팔년도 정신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일 년 뒤 저는 양양 해수욕장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제 몸에는 생각보다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팔다리는 얇았고 흔들리는 뱃살과 힘없이 주저앉은 가슴살이 제 몸에 붙어있었지요. 체지방이 빠지면서 얼굴은 늙어갔습니다.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균형을 찾아야 했습니다. 몸짱 프로젝트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하는 게 운동의 목적이 됐습니다. 그리고 과도한 운동은 몸과 얼굴을 상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행히 1년 넘게 운동한 탓에 운동 습관을 갖게 됐고 체력과 운동 수행능력이 차츰 좋아졌습니다. 몸에 힘이 붙고 기술이 생기니 운동에 재미가 붙었습니다. 그렇게 운동은 제 새로운 친구가 됐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3,4회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3년 가까이 운동을 했지만 제 몸은 헬창들의 빵빵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타고나길 멸치 유전자이기 때문에 데드리프트를 130kg까지 쳐도 가느다란 종아리는 하이에나들의 놀림감이 되곤 합니다. 그래도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좋아지긴 했습니다. 아내가 가끔 운동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저를 칭찬해 줍니다. 꾸준히 운동한 덕분에 잃어가던 남성성을 조금이나마 지키게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최근 영화 'F1'을 봤는데 60이 넘은 빵형의 몸을 보면서 운동이 답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늙을 때까지 열심히 운동하다 보면 빵형은 될 순 없어도 시니어 모델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죽기 직전까지 운동을 해볼까 합니다.


운동으로 몸이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사실 어디에 쓸 일은 없습니다. 제가 무슨 쫄티 입고 다니면서 여자를 꼬시겠습니까? 아니면 삼각빤스 입고 사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겠습니까? 물론 옷걸이가 더 좋아지고 굽은 등이 펴져서 키가 조금 커진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은 듭니다만, 그게 다입니다. 하지만 전혀 아쉽진 않습니다. 진짜 효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났으니까요. 기분 좋은 부작용이라고 할까요?


운동을 하면서 체력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일을 하고, 육아를 하고, 집안일을 해도 별로 힘들지 않더군요. 몸이 지치지 않으니 정신도 지치지 않습니다. 사소한 일에 짜증 나는 일이 줄었지요. 짜증이 안 나니 일상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더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표정이 밝아지고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에너지가 좋은 사람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부탁을 해도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최근에는 살면서 처음 듣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제가 항상 긍정적인 것 같다고요. 그래서 어딜 가나 사랑받을 것 같다고요. 예전에 함께 일하던 친한 선생님들이 제 교실 근처만 지나가도 우울하고 어두운 느낌이 난다고 맨날 피해 다녔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정말 천지개벽입니다.


몸에 힘도 생기고 정신도 건강해지니 자신감도 붙었습니다. "이 나이 먹고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보단 "이제 뭘 해볼까?"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지요. 내년에 목수 일을 배우고 현장에서 일하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 걱정도 됐지만 이제는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생각보다 훨씬 힘들겠지요. 그래도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습니다.


운동은 제 나름의 명상입니다. 운동을 갈 때 저는 핸드폰을 가져가지 않습니다. 운동하는 한 시간 동안은 오로지 쇳덩이와 저만 존재합니다.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고, 고통을 이겨내고, 호흡과 근육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온전히 저를 느낍니다. 그리고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앞으로의 계획을 어떻게 세울지"와 같은 꼭 필요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의 끝을 운동으로 마무리 하면서 혼란스럽던 마음과 몸을 정돈합니다. 제 몸과 마음이 완전히 흐트러지기 전에 운동이 조금씩 올바른 방향으로 저를 안내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보통 미용 목적으로 운동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많다면 살기 위해 운동을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원래 인간은 몸을 쓰고 노동을 하는 동물이잖아요. 운동이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운동 자체가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단순히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 우리는 밥을 먹듯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죠. 운동을 하면서 저는 제 삶이 정상궤도로 돌아왔음을 느낍니다.


운동을 하다보면 아주 미세하게 자세를 조정하면서 내 몸과 근육의 쓰임새를 알아갑니다. 모든 것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 진행됩니다. 조급해할 필요 없이 작은 변화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에 꽤 많은 것들이 변하더군요. 묵묵히 오늘 해야 할일을 하고 작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도 작은 변화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작은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헬스장에 갑니다. 나머지는 기분 좋은 보너스입니다.

keyword
삽질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