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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Aug 16. 2019

비 오는 날 수련

비 오는 날 요가 수련 중 문득 새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선생님께 물으니 아침에 자주 들린다고 하신다. 저녁에는 안 들려서 내가 못 들은 건지 아님 그동안 이곳에 지내면서 새소리 하나에 귀 기울이지 못할 만큼 가슴이 닫혀 있었던 건지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어제는 원래 수업이 없는 날인데 보강 차원에서 남성반만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날이 날인지라 많이들 못 오신 덕분(?)에 저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요가 입문 전 그저 요가도 헬스나 수영처럼 선입견이 없었는데 요가를 하다 보니 그러고 다른 분들 말씀을 듣거나 들리다 보니 남녀 구분이 좀 엄격한 분야란 걸 입문하고서야 알았다. 요가는 단체성을 강조하지 않고 개별성이 우월한 분야 중의 하나이다. 다 같이 하지만 나름 개개인이 옆사람 눈치 안 보고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 선생님도 항상 그 점을 강조하신다.


그런데 왜 여성과 남성의 장벽이 공고한 분야인지 입문을 하고 추측 건데 그 요인은 시장성과 그리고 우월성이 아닌가 싶다. 먼저 시장성이란 알다시피 경제적 논리로 요가는 남성의 헬스에 대응하는 대중적인 여성 운동(선생님은 요가를 운동으로 일컫는 것을 굉장히 거부하시는 편이시다)으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점이다. 조그마한 동네에도 요가나 필라테스가 없는 곳이 없는 거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어제의 수업처럼 보강 차원에서 요가 수련이 있는 날이나 새벽 수련 또는 워크숍 등의 이벤트가 발생 시 남녀합반으로 요가 수련을 가끔 하게 된다. 또는 개인적인 약속 등으로 여성분들이 남성반 시간에 미리 와서 수련을 하시고 가는 경우도 있고 또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남성반 티칭이 무척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고 하신다. 합반을 하면서 여성분들의 요가를 보게 된다. 니 코가 석자인데 왜 보냐고 물으신다면 보게 되는 것이 아니고 보인다고 하면 답이 될 것이다.


어떤 운동이든 모든 것은 자세에서 나온다.(요가가 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뜻은 아니다) 요가는 여성 전유물이 맞다는데 한 표를 던지는 것은 수준 자체가 다르다. 여성의 요가 동작은 남성에 비할 데가 아니다. 즉 잘한다는 뜻이다. 요가는 각진 자세보다 곡선 자세가 많은데 목표 동작에서 과정을 보면 여성이 더 자연스럽다. 억지로 한다는 느낌이 남성이면 자연스럽다가 여성이다. 개별적으로 우월을 비교할 수는 있겠으나 단체로 보면 여성이 훨씬 수준이 높다. 바로 그 우월성이다.


경제적 논리로만 성장을 해온 요가 원인뿐만 아니라 남성의 여성에 대한 비하라던지 아님 복장에 대한 무지한 발언들이 여성들을 분노케 하였고 그로 인해 여성들은 수업에 남성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차츰차츰 스며든 것이 남녀 구분의 주요 원인이겠지만, 내가 주장하는 우월성은 여성의 실력의 우월성이다. 그러니까 레벨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싶고, 못하는 부류들과는 함께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나의 비약이다. (나는 그 비약의 구조를 들여야 보고 싶어 우월성을 끄집어낸 것일 뿐,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할 의도는 전혀 없다)


선생님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주 5회 열성적으로 요가를 배우시는 여성분들이 있다는 말씀에 나도 순간 혹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리에 돌아와 주 2회도 이렇게 힘든데 근육이 버텨낼지 아님 인내력이 버텨낼지 아님 개인 약속을 깡그리다 무시하고 요가에 올인할 자신이 있는지 물어본다. 그렇다고 무조건 5일을 베이스 깔고 자신의 컨디션이 요구할 때만 수업을 듣는 것이 요가의 참된 수련인의 자세는 아닐 터이다.


요가 수업이 없는 날 이리저리 트래킹으로 몸을 단련시킬 때 문득 오늘 요가 수련을 받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요가 수업이 있는 날은 이불속에서 쏙 들어가 안 나왔으면 좋겠다 하는 날도 있었다. 남성반의 수업시간에 여성분이 같이 하는 것은 주(主)가 남성이고 객(客)이 그 여성이기 때문에 아무런 신경이 안 쓰인다. 오히려 요가에서 약자에 해당하는 남성의 경우 어제든지 환영이지만 그 반대의 케이스는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내가 객(客)으로 여성반에서 요가 수업을 같이하기엔 나의 성격이 그다지 살갑지 않을뿐더러, 주(主) 시간의 침범으로 혹시 모를 불편을 겪을 여성분들이 있을 수도 있고, 설령 안 계시더라도 그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위축되어 요가를 즐길 수가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요가 수업이 없는 날 무지 요가 수련을 하고 싶어도 포기한다. 여성은 아침저녁 교차할 수도 있고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요일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으나, 남성은 그 선택을 위해서 여러 가지 고려를 하여야 하고 결국 포기한다.


그 권리 박탈의 주된 요인은 바로 서로에게 우월감을 표출한 양 당사자 모두이며, 그로 인한 요가수련의 소외는 여성과 남성의 실력 차를 더 깊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서로 멀어져 왔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구별에서 기인된 것이고 구별은 곧 차별로 공고하게 굳어진다. 최소한 요가에서 남성의 우월성의 오만이 역차별로 되돌아온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동등하다는 서구의 선진적 요가 문화와 견주기엔 이젠 너무 멀리 따로 와버린 것 같다.


'세상일이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은 죄다 세상일이고 그래서 안 보이는 데로 치워 버리면 그만이라는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 (중략)  그런 식으로 세상일이라고 멀리 치워 버릴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둘씩 만들어지는 거겠지. 한두 사람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가 만들어지는 거겠지'

- 소설 '딸에 대하여 (김혜진)' 중에서-


세상은 남녀노소 빈부격차 등 어느 분야이든 소외되고 약자들이 있을 것인데, 나의 이런 사소한(?) 약자의 입장에서도 불편함을 겪는데 생존에 관련된 약자들은 얼마나 삶이 위축될 것이고 소진될 것인가!  내가 나의 세상에 대한 희석된 투쟁의 변명으로 오불관언(吾不關焉) 할지언데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소외된 자들은 더욱 소외될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저 지저귀는 새소리도 못 듣고 지내왔나 보다. 가슴을 열어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 싶지만 아직은 헬조선의 누적된 무기력에 헤어 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선대에 자신과 무관한 일은 죄다 세상일이다라고만 하지 않는 덕분에 후대에 맞이한 광복절 날, 비 오는 날 수련 속 새소리가 아련히 멀어져 갔다.


- 2019년 08월 16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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