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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2017), 프롤로그

어떻게든 이별, 그리고 재회 1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다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외상값은 . . . . .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  BY 류근, '어떻게든 이별' 중


여행을 나설 때 마다 시집을 두 권씩 가져간다. 이 번 여행 주제는 '이별'. 크든 작든 이별은 늘 상처가 따른다. 내가 상처를 주는 관계였든, 내가 상처를 입는 관계였든 괴로우니 이별하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별은 늘 상처를 남긴다. 몇 년 째 계속되는 무기력함. 나태함. 지치지도 않는 자기연민. 그것들과 어떻게든 이별하고 싶다. 내게 늘 상처를 주는 그들과 이 번에는 상처 하나 없이 그만, 이별하고 싶다. 이렇게 늘 결심, 만 한다. 다부진 결심만.


현재 미얀마가 처한 암흑 상황을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괴로움이 아닌 민주화로 가는 질곡의 시기라고 믿고 싶다. 영원한 밤은 없다. 매일 아침 맞는 찬란한 해는 여명 직전 새벽녘의 가장 짙은 어둠을 뚫고 나오기 때문에 황홀하다. 미얀마 국민들이 해뜨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잠식되는 일 없이 그것과 무사히 이별하고, 찬란하고 황홀하게 터져나오는 아침의 구원을 마주하기를. 


나와 연짱이가 없는 이십일 동안 살아남길 바랐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며칠 후 '이별'한 '멈.' 너와 이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19세기와 20세기 미얀마 역사를 장악한 영국 식민지 시절과 군부를 생각해보면 작금의 미얀마 군부 사태는 예견된 불행일 것이다. 불안한 반쪽짜리 평화였던 수치의 짧은 문민정부시절, 그리고 지금의 폭력적인 군부 상황을 보면서 이방인인 내가 바라는 단 하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대다수 미얀마 국민들의 안온한 삶이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았어도 맨 제 자리인 것 같아 보였던 그들의 의식수준, 교육의 기회, 살림살이가 조금씩이라도 개선되기만 바랐는데, 쿠데타로 불리는 지금의 군부 폭력사태로 현재 미얀마 국민들의 삶은 더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방인의 미얀마 행은 그나마도 기약이 없어지고 말았다. 은유적인 표현 뿐 아니라 실제로도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눈 마주칠 때마다 까맣고 총명한 눈빛으로 웃어주던 연짱이 또래 어린 딸들과 순한 아낙들, 황토 흙먼지 일으키며 저보다 큰 소를 몰고 가던 소년의 뒷모습, 수 많은 불탑들 위로 붉게 떨어지던 노을과, 아침밥 짓는 연기와 함께 작은 동네에 내려 앉아 있던 해 뜨기 직전의 가장 어둡던 여명 무렵, 그러다 어느 순간 어둠 사이로 갈래 갈래 구원처럼 터져나오던 장엄한 해는 여적 선하기만 한데.


마음은 지금 이 순간, 아니 매 순간 그곳을 향한다. 우리는 이미 예전에 잃어버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우리의 순박하고 순진하지만 그만큼 조악한 과거 역시 함께 간직한 곳. 먼 시선 들어 떠올리면 웃는 동시에 울고 싶어지는 정서가 공존하는 곳. 다 함께 못 살고 다 함께 꾀죄죄하였지만, 그래서 다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색동 고무신 고쳐신고 총총히도 걸었던 곳. 버릇처럼 할머니 등에 업혔던 휘영청 보름달 밝은 밤, 내 것인지 할머니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할머니 등에서 내 귀로 조근조근 울리고,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 코 따라 오르내리는 든든한 황톳길 위에서 가물거리다 까무룩 잠들었던 새털보다 많은 밤들. 아무 걱정도 염려도 없었던 내 지복의 시절로.


나는 지금,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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