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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마을 투어 (1)

주관적 시차, 객관적 기억 

겨울 건기의 라카인은 서늘하다 못해 밤새 추웠다. 날이 밝자 마자 일어나 잠깐 산책을 하였는데 걷는 내내 입에서 하얀 입김이. 아, 므락우가 정말 마음에 든다. 


숙소 마당 앞 연못에 피어 있던 수련. 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연꽃이든 분홍 수련이든 연꽃 종류면 덮어놓고 좋아한다. 더운 나라 수련은 아침녘에는 활짝 피어 있지만 볕이 나면 수줍어서 꽃잎을 닫는다. 적극적이지 않은 수줍음은 지극히 동양적인 정서인데, 그것을 담고 있는 미얀마 수련이 그래서 더 곱고 기특하고 그랬다. 참 예쁘다. 


시차라는 것이 있다. 지구는 동그랗고 자꾸 움직이니까 태양이 곰지락거리는 지구 모든 곳을 골고루 따뜻하게 달궈주거나 뜨겁게 구워주기 위해 필요한 시간들이 다 제각각이라는 거다. 하지만 모두 그토록 제각각이면 곤란하므로 어디에 살든 모두 객관적인 시간을 지키자고 약속을 하고, '표준시간'이라는 시간 개념을 만들어 적용하기로 한다. 그래서 어떤 국가, 어떤 도시에 들어서면 내가 속해 있던 곳의 시간은 잠시 잊히고, 그곳의 시침과 분침을 따르기 위해 내 손목에 걸려있던 시침과 분침은 새롭게 맞춰진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하고 이방인인 내가 똑같은 시간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므락우에서는 므락우 토박이 가이드 아저씨와 나와 이탈리안 커플의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런데 숙소 마당에 아무도 없다. 나와 연짱이, 이탈리안 커플을 선착장까지 픽업해야 할 가이드 아저씨도, 함께 투어를 하기로 한 이탈리안 커플도, 그 누구도 없었다. 므락우에서 므락우의 아침 8시를 사는 사람은 그들 중 나와 연짱이 뿐이었다. 그들에게 약속은 무엇일까. 한 십 여 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가이드 아저씨가 나타났고, 삼 십 여 분을 또 기다리니 눈꼽만 간신히 떼고 나온 것이 역력한 젊은 이탈리안 여자가 등장하였다. 남자 친구 곧 나올거야, 그 여자가 말하고 다시 십 여 분이 흘러서야 겨우 눈도 제대로 못 뜬 이탈리안 남자가 비척비척 내 시야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건기 므락우에서 제법 흔하게 보이는 중년, 노년의 서양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저 사람들일까. 


"이럴거면 아침 8시에 픽업하러 오겠다는 말은 왜 한 거야?"

"밤새 야간버스라도 타고 왔나 보다 생각하자, 연짱이." 

"그럼 다른 날 투어하든지 하지, 이게 무슨 민폐야. 미안하다는 말은 죽어도 없네."  


입김 흩어지는 더운 나라 아침 시간에 혹여 저혈압으로 고생할까봐 혈압 올려주느라 고생이 많다, 다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간을 사는 커플 덕분에 투어 시간이 한 시간 가량 늦어졌으니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배를 탈 줄 알았는데. 


"가이드 아저씨는 뭐라는 거야? 여기서 또 기다리라고? 왜?" 

"점심 도시락 사 오는 것을 잊었다고 그거 사러 식당 다시 갔다 오겠대." 

"뭐? 저 아저씨 배테랑 가이드라며. 투어하는 사람들 먹을 도시락을 잊는 게 말이 돼?" 


해맑은 얼굴로 미안하다는 말을 얹는 사람에게 욕을 할 수는 없어서 잠자코 있었는데, 바로 도시락을 준비하러 갈 줄 알았던 가이드는 커피를 마시고 선착장 주변에서 이런 저런 잡화를 파는 상점 주인들의 아침을 일일이 참견하고 난 뒤 느적느적 사라졌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약속은 지켜야 하고, 번갯불에 콩 구워먹고, 우물가에서 숭늉도 만들어 마시는 곧고 재빠른 한민족, 나와 연짱이는 속에서 천불이. 


아침 9시 무렵 므락우 선착장. 이글이글 사위를 태워버리는 적도 부근의 볕이 장전되기 전 아침 나절의 햇살은 참 고왔으며, 정부 보트나 사설 회사 보트가 므락우를 떠나는 시간은 해도 뜨지 않은 매우 이른 아침이어서 이 시간의 므락우 선착장은 매우 한산하였다. 


누군가의 세간살이가 실리고 있었고, 미얀마 사람들의 골격처럼 길고 조붓한 배가 모터를 단 배 위에 실려 있는 것이 재미있었다. 누가 이사가나 봐, 연짱이가 참견을 하였다. 


"이게 뭘 것 같니, 연짱이?"  

"?? 재활용 페트병에 담겨 있으니 당연히 마시는 물은 아니겠고, 기름이야?" 

"더운 나라들 기름 소비량 어마어마한 건 너도 알지? 주식이며 간식이며 볶거나 튀기는 게 흔하니까." 

"먹는 기름이라기에는 . . . 색깔이 너무 탁한데?" 

"아니면 . . . 모터 바이크에 넣는 응급용 휘발유?" 

"그런 걸 작은 구멍가게에서 막 팔아도 돼?" 


점심 도시락을 사서 돌아온 가이드에게 물어본다는 것을 깜빡 잊어서 나는 여적 이 기름의 용도를 모른다. 가이드를 기다리는 동안, 동네 아낙 하나가 폐기름으로 만든 비누를 한 보따리 사 갖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저 미루어 짐작하였을 뿐이다. 


한산한 선착장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고, 선착장 앞 구멍가게 앞에서 초록색 론지와 흰 셔츠를 입고 얼굴에 타나카를 곱게 바른 아이들이 재잘대며 등교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더 이상 팔지 않는 추억의 먹을거리들을 보며 연짱이와 신기해하고 있을 즈음 가이드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렇게 느리고 여유롭게 흐르는 시간을 사는 사람들 덕분에 늦은 아침 나절 간신히 탑승한 투어 보트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강 한 가운데에서 멈춰섰다. 화 낼 기운도 없어서 우울한 얼굴로 가이드 아저씨를 돌아보니 엔진이 죽었다며 다른 배로 갈아타라고. 


"엄마, 이런 투어 왜 하는 거지? 가뜩이나 가기 싫은 사람 동물원인데." 

"배에서 뛰어 내려서 헤엄쳐 돌아갈까, 어린이?" 


엄마의 말 같지도 않은 말에는 아예 대꾸도 해주지 않을 만큼 훌쩍 커버린 연짱이는 배를 옮겨 탄 뒤, 더는 아무런 이벤트도 없을 것이라는 가이드 아저씨의 확답을 받고 나서야 나를 돌아봐주었다. 들어올 때부터 이상해 여기, 라고 아이는 중얼거렸다. 15년 동안의 더운 나라 깡시골 여행 경험을 통해 아이는 소수 민족 투어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친족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단조로운 풍경. 


친족 마을로 가는 뱃길은 느릿하게 이어지는 1인극 모노로그(MONOLOGUE) 같았다. 계속되는 똑같은 강 풍경에 연짱이는 어느 새 졸고 있었지만, 나는 배가 물길을 가르는 소리만 들리는 평온하고 평화롭다 못해 지루한 정서가 몹시도 그리웠었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때도 그대로였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 좋아서, 눈 한 번 깜빡인다고 허망하게 사라질 모습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아는데도 나는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밤새 잠들었다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변화무쌍한 21세기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 가치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느린 강 풍경은 꽤 긴 시간 내내 반복하여 나를 다독였다. 아무리 멀리 갔어도 뒤돌아보면 그 자리 그대로 있을테니 너는 안심하라는 눈물겨운 정서, 혹은 굳은 약속. 핏발 선 눈, 뻣뻣해진 목으로 꼬리에 꼬리를 문 붉은 등의 행렬에 끼어 식은 땀 흘리며 직진만 하는 초보의 꿈에서 퍼뜩, 깨어나 진득히 땀난 이마 한 번 쓱, 훔치며 꿈이었구나, 안도하는 내 등 토닥이고 쓸어주는 우리 할머니의 손 같은 오래된 약속. 그것이 그리워 나는 황토 먼지 피어오르는 이 나라 깡시골을 자꾸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엄마, 여기는 배들이 많아. 인레 '쭌묘'처럼 물 위에 밭 만들어놓고 농사를 짓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지?" 

"뭘 심었나 본데? 다른 데처럼 땅콩밭은 아닌 것 같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자란 것처럼 보이는데, 뭘까?"  


가이드 아저씨는 처음 우리가 타고 왔던 고장난 배에 남아 있다가 나중에 우리와 합류하였고, 친족 마을에 도착하고부터는 마을 풍경을 보여주고 관광객들로부터 기부금을 얻어내느라 바빠서 무언가를 설명해줄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무엇을 위한 투어이고, 누구를 위한 투어였을까. 


잘 자라나고 있는 부지런한 누군가의 푸른 밭은 변함 없고 정직한 땅의 약속이며, 근면한 삶의 선물이다. 눈물나도록 마음 놓이는 풍경이었다. 


부지런한 배 주인댁 살림살이 좋아져서 당장 오늘 저녁 밥상머리 먹음새 좋아지고, 똑똑한 자녀는 보다 나은 교육 받고, 노년에는 좀 더 편안한 삶을 누리실 수 있기를. 


물에 잠긴 모터의 진동이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배는 첫 번째 친족 마을에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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