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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마을 투어 (2)

참을 수 없는 소수 민족 마을의 무거움 

므락우를 찾는 서양 사람들이 친족 마을 투어를 므락우 필수 관광 코스처럼 여기는 이유는 얼굴에 거미줄 모양의 문신을 한 할머니들 때문이다. 함께 투어한 이탈리안 언니는 할머니들의 얼굴 클로즈업 사진들을 지치지도 않고 찍어댔지만, 모르는 누군가의 얼굴에 사진기를 들이미는 일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내게 할머니들의 문신한 얼굴이 관광 상품인 마을은 몹시 생경하고 불편하기만 한 곳일 뿐이었다. 투어 중 친족 마을 세 군데를 들렀는데, 그 살림살이는 므락우 타운에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옹색하기 그지 없었다. 타의에 의해 문신이 새겨진 얼굴, 옹색한 삶을 보여주는 댓가로 얻은 '기부'라는 이름의 일회성 동정심에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그들을 길들인 자본과 인간의 이기심은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처음 더운 나라 여행을 시작한 이래 나의 여행 철칙 중 한결 같았던 한 가지는 '전시용 소수 민족 마을에 가지 않는다' 였는데,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 역시 사람 동물원 투어의 수요 만들기에 기여하고 동참하였으니. 내가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바가지 비용이 좀 더 들더라도 배를 한나절 전세 내어 관광객 유치용 소수 민족 마을이 아닌 므락우 일반 강변 마을을 돌아보자고 사공을 회유해보았을텐데. 후회와 깨달음은 언제나 늦되다. 


"엄마, 친족 마을 들어가고 나오는 뱃길이 좋아서 결정한 투어잖아. 결과적으로 엄마 마음이 슬픈 건 알겠는데, 할머니들 표정 좀 봐봐. 엄청 명랑 쾌활하셔. 한 땀 한 땀 손으로 짠 태피스트리(직물) 사라고 관광객들한테 영업하시는 것 보여? 할머니들 눈에서 불꽃이 튀어." 


아이는 서글퍼하는 엄마를 달래주었다. 삶에 적극적인 사람들의 모습은 소수민족 마을이든, 어부 마을이든, 농부 마을이든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용광로처럼 사랑스러운 삶의 의지는 사람 사는 데면 어디나 비슷한 것이라고, 아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할머니들, 직물 팔아서 그 돈으로 뭐하시게요."  

"엄마가 뭘 모르네. 할머니들은 당신들 예술 세계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 이렇게 적극적이신 거야. 어마어마한 아티스트들이셔."  


가이드 아저씨는 관광객들이 그토록이나 열광하는 할머니들의 클로즈업 사진을 전혀 찍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아름답지 않니, 라고 말하는 가이드를 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 오히려 내가 당황하였다. 타민족이나 지배 계층에 의한 약탈혼을 막기 위해서, 예닐곱 살도 안 된 어린 여자아이들 얼굴에 문신을 새겨넣었던 것은 라카인 친족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 잘 알려진 유명한 사실이다. 여린 피부에 촘촘히 문신을 새겨넣을 때의 공포와 고통은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연세에도 너무나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할머니들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기억이 분명한데, 그 문신의 의미를 '아름다움'을 위하여, 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도대체 뭘까. 그렇게라도 미화하여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그것으로 더 많은 기부금을 끌어내어 이 말도 안 되는 '전통'으로 생겨난 마을을 유지하고 싶은 걸까. 젊은 사람들은 모두 외지로 떠나고, 팔순, 구순이 넘은 할머니 세대만 남은 마을이어서, 전통으로 포장된 폭력적인 옛 의례가 그 분들과 함께 저물기를 나 같은 이방인도 바라는데. 예닐곱 살 아이가 소녀가 되고, 여인이 되고, 아낙이 되고, 할머니가 되도록, 여성 한 개인의 평생 희생으로 유지되어온 커뮤니티가 동일한 명목으로 계속 유지되려면 또 다른 여성의 희생이 강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관광객들을 모아놓고 이 마을과 '전통'의 취지를 자랑스럽게 말하며, 기부가 얼마나 뜻 깊고 복된 일인가를 설명하는 마을 사업 관리자의 금테 두른 안경이 노란 완장처럼 보였다. 


다음 마을에 가기 전 가이드는 배가 고픈지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을 하다가 배 위가 아닌 어느 마을 누군가의 식당이나 마당 앞 평상에 앉아서 점심을 먹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차 한 잔, 간식 한 접시라도 사 먹어야 누군가에게 손톱 만큼이라도 도움이 될테니. 


그렇게 가게 된 누군가의 집은 작은 강변 마을 어귀에 자리잡은 집이었는데, 그 집 애기들과 동네 애기들은 외지인이 드나들거나 말거나 벌거숭이 젖은 몸을 반짝이며 고운 모래 흙 위에 뒹굴었다 강물에 뛰어들었다 하며 물, 흙과 물아일체 되어 아주 신나게 놀고 있었다. 뜬금없이 등장한 모르는 아줌마의 손짓, 발짓 참견에도 아이들은 참새처럼 재잘대며 까르르, 웃어주었다. 


"아하하, 애기들, 재밌어? 완전 신나?"  

"엄마, 애기들이 해는 뜨겁고 날씨는 더운데 강물은 시원해요, 흙 바닥은 따뜻하고요, 그러는 것 같아. 홀랑 벗었는데 안 챙피해해서 너무 귀여워." 

"엄마 네 살, 다섯 살 때는 엄마 동네 아이들도 다 저 애기들처럼 놀았어." 

"엄마는 안 그랬잖아.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새침떼기였다고 할머니가 그러셨어. "


쳇, 우리 엄마는 그런 걸 내 딸에게 누설하다니. 흙을 밟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은 건강할 수 밖에 없다. 나 어릴 적 동네 아이들도 여름이면 얕은 개울에서 신나게 노는 벌거숭이들이었다. 벼라별 일이 다 일어나는 21세기의 우리나라에서 벌거숭이 애기들이 노는 풍경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으므로, 아무리 외딴 마을, 두메 산골을 가도 더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지만. 


나와 연짱이에게서 계란후라이를 조금 얻어 먹은 멍멍이 어린이. 다른 곳 내버려두고 내 발에 꼭 붙어서 낮잠을 잤다. 나름 친밀감의 표시인걸까. 생명의 따스함. 강아지 특유의 따뜻함이 느껴져서 참 기분 좋은 휴식이었다. 


나와 연짱이가 앉아서 밥을 먹었던 집 평상의 지붕. 이 동네에서 흔한 대나무잎을 엮어서 얹었다. 강바람 살살 부는 그늘 아래 앉아 있으니 졸음이 솔솔, 몰려왔지만, 나는 태생부터 새침떼기, 소심쟁이여서 남의 집 평상에 누워 아무렇지도 않게 낮잠을 잘 만큼 뻔뻔하지는 못한 도시 아줌니이다. 믿거나 말거나. 


께느른한 눈꺼풀을 밀어올리고 마지막 친족 마을로 향하였다. 친족 투어 마지막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는 아흔이 넘으셨고, 장성한 자녀들은 전부 큰 도시로 떠나고 혼자 사신다고 했다. 부모, 민족, 인종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곳을 떠나는 것이 그들의 최선이었겠지. 할머니는 자신들이 짠 태피스트리에 진심이어서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쳐 공격적 마케팅을 구사하던 다른 마을 할머니들과 달리,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이방인 아줌니와 아이를 고요하고 조곤조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 태피스트리 할머니들은 아직 젊으신 거구나. 사람이 억척스러워지는 이유는 아직은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내 것이 아닌 줄도 모르고 손 안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욕심을 내어 그러쥐어도 손을 펴보면 늘 덩그런 빈 손. 나도 모르게 연짱이를 바라보았다. 아니, 억척스럽게 지키고 싶은 것, 혹은 내려놓을 수 없는 욕심이라는 것은 연짱이가 아니라 그 때가 지나고 나면 덧없어질 것들을 욕망하는 삶 자체인지도 모른다. 


"엄마, 왜? 할머니가 너무 연세 많이 드신 게 슬퍼서 그래? 엄마도 늙을까봐? 엄마는 안 늙을 거야. 엄마는 할머니 되어도 아주 예쁜 할머니가 될 거야." 

"예쁜 할머니여도 알맹이는 할머니잖아." 


휘몰아치는 그 한 때가 지나고 나면 나는 왜 그토록이나 그것을 바랐던 걸까, 의미 없어질 참 수 많은 것들. 알고 있지만 지금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욕심이라는 것을 아주 빤히 알고 있어서, 그래서 슬펐다. 


친족 마을 초등학교. 


마을 관리자가 기부금에 그토록이나 열을 올렸던 것에 비하면 그다지 번듯해 보이지는 않았다. 교실 한 칸에서는 유치부 정도로 보이는 애기들이 영어 알파벳과 숫자, 미얀마어 숫자 등을 배우고 있었고, 다른 한 칸에서는 제법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수학을 배우고 있었다. 꽤 어려워보이는 도형 문제가 칠판 가득 쓰여 있었고, 아이들 누구 하나 한 눈 파는 일 없이 집중하고 있었으며, 오빠 선생님은 열과 성을 다하여 도형 개념을 설명하고 있었다. 방해될까봐 숨어서 들여다 보다가 금세 학교를 나왔다. 미얀마는 옆 나라 태국에 비해 문맹률이 현저히 낮다고 들었다. 미얀마는 아무리 깡시골을 가도 초등학교 정도는 당연한 듯이 있었고, 어떤 동네는 한 블럭에 하나씩 초등학교가 있는 곳도 있었으며, 이른 아침 동네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학교 내부와 마당을 깨끗이 정돈하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지역 맹주가 되어주기를 바라지만, 몇 년이 지나 다시 가보아도 맨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살림살이나 교육 체계는 힘없는 이방인 아줌니를 참 서글프게 한다. 


마지막 친족 마을 동네 한 바퀴. 


"엄마, 할머니들한테 뭐 좀 드렸어?" 

"응. 병원비하고 약값 정도."  


학교든, 지역을 대상으로 하든 일회성 후원은 안 하느니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지만, 할머니들은. 불타는 열정으로 수제 태피스트리를 판매하시는 할머니들도, 아흔 넘으신 조곤조곤 할머니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만 바랄 뿐이다. 


"와, 엄마, 보여? 돼지야, 진짜 돼지. 엄마 돼지, 청소년 돼지, 애기 돼지도 있어. 우리에 갇혀 있지 않은 돼지는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배불러서 자나 봐. 정말 쿨쿨, 자." 


사람이나 동물이나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면서 등 따숩고 배부르면 그저 행복한 거다. 물끄러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평화로웠다. 


라카인 친족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을 레이묘 강. 


배를 타고 마을을 떠나는 내 옆으로 어린 아이의 아버지일 젊은 남자가 하루 일과로 땀에 젖은 건강한 몸을 강물에 뛰어 들어 씻는 것을 보았다. 강이 터전이자 일터이고 밥줄이며 생활인 그들이 옹색한 삶을 보이고 적선 받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건강하기를. 관광객들의 일회용 선심이 젊은 세대마저 길들이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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