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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토 Sep 20. 2024

'내 편을 가져본 적이 없다'라는 말을 가라앉혀보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숨기고 싶지만, 남들은 평생 한 번도 겪지 못할 고난이랄까요, 저는 그런 일들을 꽤 거치면서 살아온 편입니다. 더구나 비뚤어진 자존감에 그런 티를 절대 내지 않고 ‘잘사는 척’해야 했기에, 속으로 삭여야 하는 고통은 지금도 떠올리기 싫을 정도도 가혹했었습니다.

당시에는 다들 별 탈 없이 잘만 사는데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내 인생은 왜 항상 이럴까?’라는 원망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내 고통만 우주만큼 커 보여 정말이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삶은 ‘티’ 하나 없이 빛나 보이기만 했던 것이지요. 친구, 남편, 부모, 신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원망을 해대며, 그렇게 나를 하염없이 찌르고 할퀴며 결국엔 나의 삶을 더욱 지옥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실은, 기억이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어딘가 고장이 났다고만 생각했지 ‘내 편이 없다’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좀 예민한 편인 데다, 언제나 비난이 먼저인 부모를 둔 탓에 자존감이 낮다고만 여겼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어린 시절 수용 받지 못했던 성장 과정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내 편을 가지지 못했다는 상처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이때까지도 뭐랄까,  분노나 원망에 가까운 감정이었지 진정한 나의 감정은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세월에 깎이고 깎여 저도 조금은 동그래져서일까요. 나의 몫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원망은 많이 사그라들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잘못도 있었겠지만,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혹은 엄마 때문에 만들어졌다 비난했던 나의 단점들이 상당 부분 기질에서 나왔고, ‘그저 맞지 않았고, 그저 그렇게 되었다’라고 받아들이는 부분도 점점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평생 무신론자였던 제가 종교를 가지면서 처음 기도했던 내용은 ‘제발 고난을 겪지 않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어떤 고난에도 무너지지 않게 해주세요’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내 편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는 그저 온전히 나 자체로 수용 받아본 적이 없다는 의미일 뿐이었습니다.     




제 감정을 조금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사건은 종교를 가지고도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바라지 않았다고 하지만 내심 하느님이 나를 봐주길 바랐건만, 인생 최악의 사건들은 잊을 만 하면 갱신되었습니다. 아, 이번에는 정말 버티지 못할 거 같다, 할 정도로 바닥에 다다랐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한번은, 떼쓰는 아이처럼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발을 둥둥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펑펑 울며 털어놓고 싶다. ‘나 힘들어, 정말정말 힘들어, 엄마,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나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이렇게 말이지요. 그렇지만 엄마가 뭐라고 내 탓으로 돌릴지, 남들 보기에 어떻게 잘사는 장녀처럼 보여야 할지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도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하지 못할 이야기들. 내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보다, 늘 속으로 삼키며 한 번도 내 속을 드러내지 못한 깊고 진한 슬픔이 처음으로 사무치게 스며들었습니다.    




얼마전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를 읽으며 ‘감정인식명확성 연습표’라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단어들로 자동적인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구별해주는 연습인데, 이 표를 체크하면서 저는 당연히 불안, 두려움, 억울함이 나올 거라 예상했습니다만, 너무나 놀랍게도 전부 ‘외로움, 서운함, 슬픔’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자신을 아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면을 잘 쓰고, 잘 포장하며 살다 보니 나의 진짜 모습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불안하고 두렵지만 아주 억척스럽고 모질게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외롭고 슬펐을 것입니다. 그런 낯선 나를 마흔 중반에 다다른 지금에서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지금 ‘내 편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라는 글을 쓰며 여러분께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내 편을 가져본 적이 없다’라는 말을 가만히 가라앉혀, 거짓들이 씻겨 사라지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을 지켜보면, 나에게서는 ‘외롭다, 슬프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나는 내 편을 가져본 적이 없어.'가 아니라 실은 '나는 아주 외롭고 슬픈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싶은게 아닐까, 라는 진짜 마음속 이야기들을 말이지요.



여러분이 진짜,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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