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받지 못했다는, 지워지지 않는 슬픔
머릿속이 항상 생각의 꼬리와 꼬리들로 뒤죽박죽이 되는 일은,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입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당연히 지나고 나면 모두 잊어버리지만, 많은 일을 겪었던 30대 중반 이후부터는 비교적 비슷한 내용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제가 한 행동이나 말들에 대한 설명, 변명, 합리화 같은 상상들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살이 많이 빠졌어?’라고 물었습니다. 내 느낌에 지인이 당황해하며 ‘그냥 운동 좀 했어.’라고 대답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대화입니다. 하지만 ‘지인이 당황한 거 같은’ 느낌에 꽂힌 나는, 혼자서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냥 더 이뻐진 거 같아 한 말인데, 친구가 기분 나빴나?’, ‘그런 뜻 아니었다고 문자를 보내야 하나?’, ‘문자는 오버야. 다음에 만나면 자연스럽게 칭찬하면서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알려줘야겠어.’
내가 하기로 한 작업이 중간 관리자의 실수로 조금 늦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잘 정리가 되었고, 굳이 다시 해명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어느 한구석 찝찝한 마음이 든 나는 그 부분을 상사에게 나의 실수가 아니었음을 설명하는 상상을 계속 합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저 역시 SNS를 통해 과도하게 자신을 과시하거나 혹은 반대로 비난과 공격을 가하는 행동이나, 자기희생 아니면 완벽주의자 같은 유형만 인정중독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정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부정적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며, 잘 이해하고 올바르게 채워 성장의 밑거름으로 만들어야 한다, 고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저 소심해서 혹은 예민해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나 말을 되씹는 줄만 알았지, 이 또한 인정중독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칭찬은 고사하고, 작은 일에도 혼이 나기 일쑤였습니다. 당연하지만 자신을 합리화하는 행동은 주양육자(부모)로부터 인정받기 위해(다른 말로, 혼나지 않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방어의 흔적입니다.
참, 내 편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아픔이 이렇게 평생의 슬픔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일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타인에게 있어,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나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슬픔 말입니다.
저에게 있어 그 끊기 힘들다는 마약보다, 더 끊기 힘든 일이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일인듯 합니다.
누군가는 쉽다고 말하지만, 못하는 사람은, 못 하는 일입니다. 마치 숨을 쉬고, 눈을 감는 일처럼 나도 모르는 새, 타인으로 자신을 채우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평생의 작은 습관이 자신의 삶 전체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어내지도 못하고, 또 마약처럼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결국엔 내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더욱, 저는 이 인정중독이라는 이 일종의 병을 고치고 싶습니다.
인정중독을 치료하는 첫 번째 단계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이미 저는 심각한 중독 상황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 걸까요.
아마 절대 쉽지 않을 여정일 것이며, 어쩌면 평생에 걸쳐 애써야 할 일일 것입니다,
자신을 돌보다 보면 자신의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타인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는지도, 할 수 있을지도요.
그럼에도 제일 되고 싶은 사람은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사람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에 타인의 이해와 인정을 바라지 않는 그런 단단한 사람 말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아이가 오늘 해달라는 놀이를 해주지 못한 핑계를 대고 있고,
지난 주말 시부모님께 전화를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게 하지 고민하고 있는,
이토록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있는 저는,
과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무서운 인정중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