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남편이 된다는 것
1.
봄이를 처음 봤을 땐 점 하나였다. 그러다 사과씨만큼 크더니 이내 대추만큼 자랐다. 봄이가 자라는 동안 집 앞 공원은 꽃이 한창이었다. 개나리는 싱싱한 연두색 잎과 노란 꽃잎이 점점이 피었고, 목련은 낮에도 밤에도 하얀 횃불처럼 타올랐다. 벚꽃이 지천이었고 바람이 날리며 꽃길을 깔아주었다. 공원을 굽어보는 북한산은 진달래가 만개하고 연한 풀빛이 아름다웠다. 봄이가 봄과 함께 자라고 있었다.
봄이의 심장은 빠르고 힘차게 뛰었다. 점프하고 내려와 바닥에 닿자마자 다시 또 뛰어오르는 것처럼 간격 없는 박동이었다. 온 생명이 심장을 뛰게 하는 일에 쏟는 듯했다. 뚜쿵뚜쿵뚜쿵뚜쿵. 결의에 찬 눈빛처럼, 거침없는 발걸음처럼 오로지 생명, 생명, 생명이었다. 몇 초 남짓한 심장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돌아보게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 있었다.
아이가 씩씩하게 자라는 동안 아내는 살이 빠졌다. 음식을 못 먹는 입덧이 왔다. 밑반찬을 담아놓은 것을 보지 못했고 음식 냄새 때문에 냉장고도 열지 못했다. 먹고 싶다는 감정을 넘어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평일 저녁은 대부분 외식을 했고 주말에 집에서 먹을 때면 누구 한 명이 먼저 먹고 나서 다른 사람이 먹기도 했다. 뭐라도 먹고 싶다는 게 있으면 사다 줄 텐데 그것조차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한겨울에 수박을 찾는다든가 하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이건 이것대로 괴로운 일이었다. 먹고 싶은 게 없는 것뿐만 아니라 소화도 안돼서 쓰리고, 더부룩한 나날이 이어졌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아내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내게 큰 힘을 주었다.
2.
4월 26일 화요일 아침, 지하철을 막 내려 회사로 향하려는데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나 너무 아파”
심상치 않았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장모님, 장인어른도 오시기로 했다. 집에 가니 아내는 모로 누워 식은땀을 흘리며 아파했다. 장모님 지인을 통해 인*병원 병원장님과 연결이 되어 바로 병원으로 출발했다. 아내를 알고 난 후 이렇게까지 아파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두려웠다. 그저 옆에서 앉아 손을 잡거나 따뜻한 걸 덮어주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력감에 젖어들었다.
병원에 도착해 바로 진료를 받았다. 검사 결과 난소 쪽에 물혹이 있는데, 이 물혹이 커지면서 난소 위로 말려 올라갔고, 연결되어 있던 혈관 등이 꼬이며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원장님은 병원에서 오전에 입원하고 추이를 지켜보다 오후에도 통증이 지속되면 수술하자고 권했다. 통증은 오후에도 남아있었고 결국 수술하기로 했다. 원장님은 물혹이 아프지 않은 위치로 가서 잘 있으면 괜찮지만 어쩌다 다시 꼬이고, 터지기라도 하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아내가 시한폭탄을 안고 남은 임신기간을 보내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다는 의견이었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전신마취를 하는 복강경 수술.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장모님과 함께 대기했다. 대기장소는 수술실과 분만실, 신생아실이 맞닿아있는 둥그런 공간이었다. 장모님과 함께 수술/분만실을 마주 보고 앉았고 뒤쪽으로는 신생아실 유리창이 둘러있었다. 신생아실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창문을 두드리지 말아달라는 등의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간호사가 유리창 커튼을 걷었고 아기들의 가족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창 가까이 오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구~ 저 웃는 것 좀 봐' '코가 딱 엄마 닮았네'. 고개를 돌려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수술/분만 현황 전광판을 보았다. '김** 수술 중'.
3.
4월 25일 월요일은 결혼 1주년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입덧이 심했고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다 했다. 이런저런 메뉴를 고민하다 홍대입구역 쪽에 있는 송담추어탕을 가기로 했다. 그러다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불광역까지 걸어오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는 집으로 가라 하고 추어탕은 포장해가기로 했다. 초콜릿 전문점 17도씨에 들러 케이크 한 조각과 마카롱 2개를 샀다. 추어탕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거실에서 케이크에 초 하나 꽂고 조촐하게 1주년을 기념했다. 다음 날 아내는 수술을 했다.
4.
4월 23일 토요일, 아내가 갑자기 배가 꼬이는 듯 아프다고 했다. 주차가 지나며 배가 당기는 증상이 있을 수 있다고 들어서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다행히 집에서 쉬자 통증이 가라앉았다. 사실 첫 초음파를 찍었을 때 5cm 크기의 물혹이 있는 것을 알았다. 다만 흔히 생기는 증상이고 5개월 정도 되면 자연스럽게 없어진다고 했는데 두 번째 찍었을 때 7cm로 커져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배가 너무 아프면 물혹이 터진 것이니 119를 불러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을 가라고 했다. 이후 아내는 임신 중 물혹 관련 내용을 계속 검색했고 불안해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수술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안정기라 불리는 12주 이후의 사람들이었고 아내는 아직이었다. 그래도 당장 어디가 아프거나 한 건 아니었고 잘 쉬며 마음 편히 지내면 사라지겠지, 엄마 더 잘 쉬라고 봄이가 혹을 만들었나 보다 했다. 사흘 후 아내는 수술을 했다.
5.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집도한 선생님은 꽤 젊은 분이었고 예전 제*병원에서 복강경 수술로 많은 경험을 쌓은 분이라 했다. 장모님과 나를 불러 제거한 회색의 물혹 껍질을 보여주었다. 뱃속에 있을 때는 어른 주먹 하나 크기였다고 했다. 나중에 주먹 하나를 아내 배에 대어보았다. 어디에 들어갈 구석이 있었는지... 선생님은 또 꼬인 부위가 약간 파랗게 변색된 사진을 보여주었다. 혈관이 막혀 파랗게 되었고 조금 더 진행되면 괴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잘 떼어낸 것이다.
"선생님, 아이는요?"
"아이는 초음파 봤을 때 심장 잘 뛰고 있었어요. 괜찮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사람들이 왜 의사에게 감사하다고, 선생님 제발 우리 애 좀 살려주세요라고 하는지 실감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거였다.
6.
3박 4일간 입원한 뒤 아내는 퇴원했다. 입원 중 아내는 일어난 일은 나중에 보면 다 뜻이 있다고 믿었다. 봄이가 엄마를 더 푹 쉬게 해주려고, 혹은 물혹이 계속 커져서 자기 살 공간이 줄어드니까 물혹을 없애려고(이놈이 ㅋㅋ) 꼬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담담하게 있던 아내는 밤에 봄이에게 미안하다며 울었다. 나는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봄이가 우리 피를 받았으니 알아서 독하게 잘 살아갈 거라고 했다. 봄이의 몫은 봄이가, 엄마의 몫은 엄마가 가져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져가야 할 몫은 무엇이 있나 생각해봤다. 아내 뱃속에 물혹이 있는 걸 알고, 커진 걸 알고, 통증이 있는 걸 알고, 수술과 전신마취를 해야 한다는 것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아내와 아이의 생명이 직결된 상황을 개선하는 데 남편이자 아빠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의학적 지식도, 통증을 가라앉히는 약손도, 수술할 수 있는 능력과 면허도 없다. 가족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무색해져 버렸다. 색을 잃고, 힘을 잃었다. 무력해졌다.
그러나 무력함을 갖고 가는 게 내 몫은 아닐 것이다. 할 수 없는 것들을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을 보아야 한다. 병원에서 함께 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눈물을 닦아주고, 입원/수술비를 낼 돈을 벌어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봄이가 세상에 나오고 조금씩 자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조금씩 더 늘려가면 된다. 할 수 없는 것에 무력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게 내 몫이다.
다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고 남편 노릇, 아빠 노릇 해나가려 한다. 나는 시시때때로 다른 사람과 세상의 기준에 나를 대어보고 비교할 것이다. 세상에서 기대하는 남편의 모습, 아빠의 모습에 나를 대어보고 삐져나온 건 자르고, 부족한 건 붙일 것이다. 똑바로 자르거나 붙이지 못하면 자책도 해가며 무력감을 느끼고 한숨지으며 살 것이다. 사람이니까. 나는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그것 하나 분명히 알고 열심히 인생 사는 내 모습을 받아줘야지.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지.
*
봄이야, 씩씩하게 버텨주어 정말 고마워.
민지야, 우리 가족 밝고 긍정적으로 이끌어주어 고마워. 또 참지 않고 눈물 흘려주어 고마워.
사랑해 우리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