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기억에서 영원의 추억으로
문득 사진처럼 찍히는 일상의 순간이 있다. 어떤 예고나 조짐 없이 만나는 그 순간을 따로 담아낼 여유가 없으므로 일단 눈으로 찍는다. 눈으로 찍으면 이내 현상되어 가슴속 앨범에 보관된다. 그리고 잠시 앨범을 들춰보면 이제껏 찍어온 순간들을 볼 수 있다.
사진으로 찍혀 남아있는 순간들은 크게 대단한 순간은 아니다. 이를테면 겨울날 일요일 아침 베개에 머리를 묻고 엎드려 자고 있는 헝클어진 머리의 아빠, 토요일 점심 낮잠을 자다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늘어진 햇빛과 창 너머 역광으로 보이는 황금빛 나무와 하늘, 푸른 새벽 스르르 이마에 올려진 엄마의 손에 눈을 떴을 때 들어오는 흐릿한 파마머리와 얼굴 윤곽 그리고 더 자도 돼 하는 목소리, 쏟아지는 소나기에 철벅거리며 흘러가는 빗물을 뛰놀던 어린 동생의 작은 다리와 한 손에 든 우산 등. 이유도 맥락도 모를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요즘 들어 부쩍 아내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잠시 골똘하게 갸우뚱하는 아내의 옆모습, 출근할 때 아직 모로 누워 자고 있는 볼록한 배와 반쯤 걷어올린 잠옷바지, 불광 NC백화점 1층 신발매장에서 눈은 약간 치켜뜨고 코는 살짝 찡긋하고 한 손은 턱을 괴고 다른 손은 캔버스 천가방을 안고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뒷모습, 퇴근길에 만나 집으로 함께 걸어가는 도중 마주 잡은 손과 둥그런 배를 살짝 안은 다른 손 그리고 사부작사부작 걷는 약간 아저씨 같아진 내 아가씨의 걸음걸이 등. 언젠가부터 항상 곁에 있었지만 몰랐던 순간들이 눈에 담긴다.
사진처럼 찍힌 순간들은 특별할 것 없지만 그 순간에 찍힌 허공의 먼지 하나, 이불 보푸라기 하나, 모기장에 들러붙은 머리카락도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찍은 기억의 사진은 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내가 40~50대 중년이 되고, 봄이에게 아이가 생겨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문득 비치는 햇살에서, 특별할 것 없는 거실 바닥에서, 쇼핑센터 동그란 의자에서, 그리고 내 손바닥에서 언제든, 어디서든 되살아날 것만 같다.
사진 같은 순간들이 여러 이름의 앨범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중 아내라는 이름의 앨범에 사진 한 장 새로 끼워 넣는데 마음이 따뜻해지고 코끝이 찡하고 살짝 눈물도 난다. 일상의 감동이 이런 것일까. 이 아름다운 일상에 봄이가 와서 새롭게 생길 풍경이 기다려진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사진을 담고, 사라지지 않을 삶의 앨범을 만들어간다. 아내와 나, 그리고 봄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