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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교육가 안용세 Dec 14. 2021

기억과 망각 사이

'사이'에서 던지는 물음들

2021년 ‘만질 수 있는 이야기’가 들려주는 두 번째 이야기는 평화의 소녀상, 나비가 된 소녀의 이야기다. 올초 찬바람이 제법 누그러들 즈음 청소년열정공간99도씨 김부일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99도씨 청소년과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평화의 소녀상을 주제로 작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2017년 99도씨 청소년들과 수어를 가지고 짧은 퍼포먼스를 발표한 적은 있었지만, 당시 위안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보여주기에 급급했던지라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절로 몸이 움직였다.     


세월을 거슬러 함께 바라보는 세상

호기롭게 포문은 열었지만 진행 과정은 신중을 가해야 했기에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자료수집을 위해 다양한 문헌 탐색과 나눔의 집 답사까지. 진실을 알면 알수록 앞으로 한 발 내딛는 것이 두렵고 무거웠던 게 당시의 마음이었다. 두 달여간의 수집된 사료를 바탕으로 7주간의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구성 후, 드디어 첫 시간. 돌아보면 앞으로 무엇을, 누구를 위해, 왜 하는지 어렴풋이 눈치챘을 99도씨 청소년의 믿음과 신뢰가 새삼 고맙다. 그들과 함께 만들어간 그날의 시간이 이제야 하나 둘 소화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영글어 익어가는 계절의 과일처럼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다수의 권한과 힘의 관계를 몸으로 나타내는 학생들

이미지 연극(image theatre)은 이번 작업에서 소녀를 둘러싼 갈등과 억압을 마주하는 주요한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이미지 연극 안에서 학생들은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이미지를 만들고 변주하며 그들에 대한 여럿 관점을 토론한다. 그리고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생존 방식을 이미지 연극 안에서 즉, 우리에게 잔존하는 그들만의 생존 방식을 마주하게 된다. 이미지 연극을 통한 이해관계의 갈등과 억압된 상황으로의 몰입은 오늘날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더하여 그 순간 대상의 갈등과 불가피한 억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그간 나는 어떠한 선택을 해 왔는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된다. 내 안에 품고 있던 질문은 마주한 대상을 통해 오늘의 ‘나’를 성찰하고 변혁하는 실마리가 된다.


결국, 이미지의 구축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억압받는 한 사람이 억압하는 한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이미지로 소녀의 억압을 표현하고 있는 학생들

이미지(image)는 사고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추상적 개념이 가시화했을 때 사람들은 눈앞의 것을 진실로 믿게 된다. 특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기억하려는 의도된 실천을 수반한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망각된 것은 잊혀진 것이 아니다. 마치 망각되어 어딘가로 사라진 것 같지만, 어딘가 깊이 저장되었다가 끊임없이 조각난 파편들로 문득 되돌아온다. 어떠한 단상으로 드문드문 찾아오는 기억은 그 전체적인 의미가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기억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미지로 당시의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학생들

그러므로 망각하지 않으려는 의도된 실천으로서의 ‘조각상(statue)’은 기억을 붙잡아 두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다. 또한, 추상성의 가시화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힘은 현실 세계에서 믿음으로 쉬이 치환되기 때문에 상(像)의 역사는 길고도 짙어 왔다. ‘기억과 망각 사이’는 조각상과 그것의 상징을 단서로 시작된다.


소녀를 위협하는 일본군의 억압

과거를 기억하려는 노력이란 때론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 고통의 과정은 잃어버린 우리의 시간을 되찾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기억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국, 망각되었던 과거는 되찾은 기억 안에서 삶이 새롭게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우리는 그 기억을 안고 세상을 조금은 달리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갖는다.


기억의 역사에 관하여,

기억의 염원에 관하여,

기억함의 행위는 내 삶에 무엇을 남기게 될 것인가?


평화의 소녀상과 눈을 맞추는 소녀

때론 너무 가까이에 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기억(memory)과 망각(ovlivion)은 정 반대편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한 기억과 망각 사이를 유심히 조망하면 갈라진 틈(crack) 사이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을, 그러한 현실을 나는 어떠한 눈으로 조망하며 그와 동시에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는가? 기억과 망각 ‘사이’에 서서 진지한 물음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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