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누나

by 올빗ORBIT

필름이 끊겼다. 드문드문 일렁이는 기억들이 꿈같다. 몽롱한 의식을 부유한다. 술은 식품이라기보다 약이나 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까지 술을 먹고 나면 항상 다시는 먹지 말아야지 같은 1회성 다짐만 남는다. 멀미가 난다. 어지럽고 속이 좋지 않다. 차라리 토해버렸으면 싶은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헛구역질만 하다 핑그르르 생리적인 눈물만 훔친다. 술은 감정을 확대하거나 극대화시키는 촉매제가 아닐 수 없다. 기분이 좋을 때는 더 좋고 슬플 때는 더 슬프다. 무의식의 저변을 건든다. 술에 먹히는 순간이 오면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거나 반복하고 있다. 뇌가 술에 잠기는 순간이다. 유체 이탈해서 전지적 시점으로 나를 바라본다. 관찰만 가능하다. 통제는 안되고 나는 내가 아니다. 집에는 기가 막히게 잘 찾아간다. 의식은 어딘가에 묻어버리고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내 폰 어디 갔지?

불과 5분 전에 애인과 통화를 하며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잊었다. 옷을 갈아입다 침대 어디 구석에 처박힌 폰을 새벽 내내 찾아 헤맸다. 무음인 것인지, 배터리가 나가 있는 것인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울리지 않는다. 일행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무던히 멀쩡한 척하며 집에 잘 찾아와 놓고, 잃어버린 물건 하나 없이 잘 챙겨 와 놓고 집에서 길을 잃는다. 정신머리와 함께. 이제는 어릴 때보다 더 잘 취하고 자주 필름이 끊긴다. 필름이 끊기면 그때부터 알콜성 치매 초기라는 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든다. 동생은 퇴근 후 내가 야식 사서 들어오기를 기다리다 야밤에 폰을 찾아 나서야 하는 가혹한 운명에 처했다. 흑역사. avi. 이게 뭘까. 취한 누나가 어이없고 웃겼는지 카톡에 간밤의 만행들이 고스란히 촬영된 동영상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신랄하군. 이 정도면 기생충급인데. 드라마나 영화의 만취 연기들을 보며 정말 연기를 연기처럼 한다고 생각했는데 동영상 속의 내가 그러고 있었다. 아, 그들의 연기는 진짜구나. 발군의 관찰력이구나. 메서드급이구나. 결국 새벽의 폰 찾기 대소동은 연동된 노트북으로 내 방의 좌표와 함께 종식되었다. 좌표가 내 방을 가리킬 때의 공포란 그 어떤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보다 무서운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범행을 잔뜩 저질러 놓고 모든 증거가 나를 가리킬 때. 좋은 소설 소재라고 생각한다. 대신 누가 써줬으면 좋겠다.

-누나 기억은 나? 발뺌할까 봐 다 찍어뒀지 뭐야.

진한 혈육의 정이다. 필름 끊겼을까 봐 친히 기록물을 남겨준 동생의 눈동자에 건배를. 아니다. 당분간 술은 입에도 대지 말아야지. 건배 이야기만 들어도 울렁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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