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앞에 머무는 시간, 나를 적시는 감각

전시회에서 마음에 드는 한 점으로 글쓰기

by 바다기린

예술가는 아니지만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감각으로 예술을 즐긴다. 지나치게 생생한 현실에 지치고, 감정이 바스라지며, 무통 주사를 맞은 듯 감각이 무뎌질 때면 일상에 작은 변주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감지한다. 그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는 예술가들의 섬세한 시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체력이 될 땐 멀고 넓은 미술관을, 여유가 없을 땐 가까운 갤러리나 작은 전시 공간을 찾는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 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다가 마침내 가게 된 장소다.


2025년 봄,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 터널을 지나, 적당히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자 낯선 듯 반가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일 오후, 조용한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마주한 의외의 풍경. 김환기의 작품은 이미 여러 전시장에서 보았지만, 이 공간에서의 만남은 전혀 달랐다. 하우스 갤러리에 초대된 듯, 안팎을 넘나들며 산책하듯 그림을 보는 시공간은 여유롭고 다정했다.


환기미술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 같았다. 건물 안 구조는 관람의 방식에 변주를 더한다. 정면에서 보는 그림과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가까이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한 전체의 흐름이, 멀리서 보면 불쑥 다가온다. 타원형, 사각형, 삼각형 등 작가가 즐겨 그리던 도형들로 이루어진 건물의 외형은 자연과도 잘 어울렸다. 하늘과 나무가 스며드는 창, 그림의 틈으로 들어온 햇빛. 그 조화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졌고, 그 변화는 하나의 선물이 되었다.


그날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작품은 <16-IX-73_318〉(1973)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그림과 나 사이의 거리가 사라졌다. 점을 따라가다 선을 만나고, 선 끝에서 나를 마주쳤다.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그 자리에서, 내 마음을 붙잡는 글을 썼다. 그림 앞에서 마주한 감정은 조용히 나를 적시고, 다시 돌아갈 힘이 되어주었다. 그날의 글을 꺼내 본다.

김환기, <16-IX-73_318〉(1973), 출처: 환기미술관

― 삶이 그린 길로 이어지는 우리 ―

한참을 그림 앞에 머물렀다. 응시하던 눈은 의지와 상관없이 선을 따라간다. 끊기지 않는 탈출로를 찾다 캔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포기하지 않으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곳이 정말 끝일까. 끝이 있기는 한 걸까.

밝고 가느다란 선은 마치 물감의 맥처럼 번져 있다. 선을 그은 것이 아니라, 선을 비워두고 그림을 채운 듯하다.

그 사이에 찍힌 무수한 점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치 우리 삶처럼. 점들은 홀로 있지 않다. 서로의 곁에서 나란히, 혹은 겹쳐 흐르며 각자의 시간을 그려나간다. 어떤 점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또 어떤 점은 잔잔한 강물처럼 스쳐간다.

그림의 중심은 상대적으로 짙다. 문득, 이 그림의 시작도 중심의 한 점에서 출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중심을 지키며 번져나가는 파동처럼, 멀어져도 결국 자기 중심으로부터 나아가는 존재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산과 바다, 하늘과 같은 자연을 품은 하나의 우주였다. 그리고 그 모든 시작은 단 하나의 점에서 비롯된다.

그 점은 곧, 우리로 이어진다.


실천 질문

Q. 오늘 내가 머문 작품은 어떤 마음에 닿았을까?

Q. 작품을 본 내 마음을, 짧은 문장이나 단어로 남겨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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