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을 빌려 나를 표현하기
누군가 내게 “당신을 설명해 보라”라고 한다면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다. 입술은 움직이지만 마음은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표현하는 다른 방식을 찾게 되었다. 그 시작은 그림 속 얼굴들, 특히 자화상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바스키아의 거친 선, 에곤 쉴레의 뒤틀린 몸, 고흐의 지그재그 붓결. 살아온 시대도, 얼굴도, 마음도 다른 그들의 자화상을 오래 들여다보다 문득, 내 안에도 이런 얼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때로는 사물, 동물, 풍경, 추상에서 더 깊은 나를 마주한 적도 있었다.
그림 감상 수업에서 자화상을 고르고, 그 그림을 빌려 나를 표현해 보는 글쓰기를 한 적이 있다. 고흐, 렘브란트, 호안 미로, 에곤 쉴레, 바스키아… 시대도 색도 표정도 전부 다른 자화상들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 처음엔 망설였다. ‘이 얼굴과 나는 너무 다르잖아’라는 거리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니, 내가 느낀 감정이 그 안에도 있었고, 어쩌면 그 감정을 가진 얼굴이 내 안에도 있었다. 그 순간,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머뭇거리던 마음이 문장으로 번져갔고, 그림의 표정이 내 마음의 언어가 되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건, 나를 직접 그리는 것보다 더 깊은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익숙한 말 대신 그림의 표정, 색감, 붓의 결을 빌려 감정을 꺼내는 일이었다. “내가 자주 감추는 얼굴은 이런 표정이었구나.” “지금 내 마음은 이런 붓질에 가까운가 보다.” 예술가의 고백 속에서 나의 고백이 흘러나왔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나 역시 자화상 글쓰기 수업을 기획해 보았다. 그림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그림 속 주인공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스스로의 감정을 읽어내는 연습. 함께한 누군가는 “이 그림, 지금의 저 같아요.”라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처음엔 불편했는데 자꾸 보니 마음이 열리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 문장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림을 감상한 게 아니라, 그들은 분명 ‘자신의 마음을 감상한 것’이었다고.
나도 지금의 나 같은 그림을 만난 적이 있다. 권마태 작가의 <빛나기 위해 7>. 그림 속 아기코끼리를 처음 본 순간 휘몰아친 감정은 그림 속 붓 자국처럼 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불확실함에도 머물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가고 다가오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붓 자국이 강한 인상으로 각인됐다. 마치 나의 자화상을 만난 듯, 내가 닮고 싶은 나를 본 듯했다.
이후로 나는 자화상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전시장의 한 벽, 책 속 한 장, 책상에 놓인 엽서 한 장에서도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본다. 직접 그리진 않지만, 그 얼굴을 빌려 내 마음을 옮긴다. 어쩌면 나는, 그림 속 타인의 얼굴이나 무언가를 빌려 조금씩 나를 써 내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표현하는 순간, 나는 나를 다시 발견한다.
– 자화상, 나를 비추는 틈 –
거울보다 오래 머물게 되는 얼굴이 있다.
나와는 너무 달라서,
그래서 닮고 싶은 얼굴.
그 얼굴을 빌려 마음을 꺼낼 때,
나는 비로소 나를 말할 수 있었다.
실천 질문
Q. 오늘의 나와 닮은 자화상을 떠올려본다면, 어떤 표정 혹은 어떤 것일까요?
Q. 그 얼굴 혹은 그것이 나에게 말을 건다면, 나는 어떤 문장으로 응답하게 될까요?
커버 그림: 송선희 <소중한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