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자 팀장의 하루 ep24
실수다.
내가 그분을 만난 건.
전 직장 사장님은 내가 모시던 분이다.
흔히 말하면 악덕 사장님이었다.
나름 유복하게 성장하신 듯 하지만, (유모 선에 컸다는) 정서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바 없다. 그저, 현금 많은 중소기업 사장님이다. 하지만, 환갑도 넘으셨고, 더군다나 알코올성 치매가 있으셔서 기억을 종종 못하시고, 남 탓을 하며, 상대방을 의심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드신다. 폭언을 하시고, 직원들을 믿지 못하고, 하대하신다. (무조건 본인 기준 못 배워서 직원들이 저 정도밖에 안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솔직히, 미국에서 공부도 하신 분이 어떻게 저렇게 본인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성차별적인 발언과, 사회적으로 하지 말하야할 계급주의적 말을 하시는지... 정말 의아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월급 준 만큼 직원에게 이 정도 욕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분이기도 하다. (동생이 부사장님으로 있는데, 두 분 성격이 대조적이긴 하지만 다 거기서 거기였다. 직원들끼리 이간질시키게 하고, 말 돌리고, 말 흘리고, 중요한 건 결정 못하고, 형하고 싸우고, 밀리고... 다 잘못한 거는 직원들에게 전가하고... 사장, 부사장 눈치 싸움에 정말 피곤한 곳이었다.) 두 분 다 배우고, 돈이 많은 것에 비하면 인품은....
장점은 있다. 중소기업이지만, 연봉은 잘만 하면 매해 10~15% 상승, 돈 보고 다나는 곳이다. 행복은 없지만, 사장님에게 '돈'은 파워이자, '재미'이고, '복지'이다. 사장님도 "내가 못 배우고, 못 사는 너희들에게 내가 이 만큼 베푼다. 감사해라. 너희가 어디가서 이런 대접을 받니!"라는 프라이드가 있으시다. 그래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은 이 직장을 떠나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또 반전은 반대로 모든 직원을 하대한다기보다, 약간 맘에 드는 1-2명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극우대를 받는다. 사장님에게 이쁨을 받는 순간 (=이 애는 괜찮은 애라는 기준에 들어가면.... 예를 들면,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 좋은 대학 나온 사람, 석사 받은 사람, 대기업에 있던 사람, 또는 그냥 이쁘거나... 등등) 업무 능력에 상관없이, 그들의 말을 절대적으로 듣는다. 전문성에 상관없이, 그들에게 온갖 부서의 평가를 하게 하고, 잘잘못을 지적하라고 하고, 그들이 사장님에게 전달하는 말이 곧 진리요, 파워가 된다. 그래서 그 이쁨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등에 엎고, 사장님을 구슬리거나, 악덕같이 힘들고, 그만큼 피곤하긴 해도, 버틸 만큼 버티다가 딜을 한다. 즉, 사장님에게 한 번씩 퇴사하겠다거나, 일이 힘들다고 한다. 그럼, 힘들면 1달도 유급으로 쉬고 오라고 하기도 하고, 다시 네고해서 연봉을 올려 주는 건 기본, 고속 승진 (몇 개월 만에 팀장을 달기도 하고, 요구하는 데로 과장, 차장, 부장... 쑥쑥 올라간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또 몇 달을 다시 다닌다. 그들은 성과급도 두둑이 받는다. 이만큼 올려주는 직장도 없다. 나도 돌아보면, 매번 연봉 협상 시, 올라가는 연봉만은 좀 생각나긴 했다. 사장님만 잘 상대하면 되니까.
나도 한 때는 사장님에게 이쁨을 받기도 했다. 전략기획팀을 신설하고 팀장으로 있으면서, 회사 전반의 모든 부서를 평가하고 관할했다. 포지셔닝이 "비서"가 약간 내재되어 있어, 주말에도 쉴세 없이 카톡이 왔고, 사장님이 원하던 시간에 5-10분 내로 카톡이나 전화를 받지 않으면 열같이 화를 냈다. 난 휴가도 제대로 낼 수 없었고, '허락'하에 낼 수 있지만, '변덕'이 심해서, 본인이 휴가 갈 때 가면, 내가 남아서 사무실을 대신 지켜줘야 한다며 있으라고 할 때도 있고, 아니면, 나의 개인적인 일정과 상관없이, 본인 휴가 일정에 내 일정도 맞추라고 통보한다. 솔직히 근무하던 2년 9개월 동안 내 인생의 주도권은 없었다. 그렇지만, 10명의 팀원이 내 밑에 있었고, 그만큼 성과급도 받았고, 인정도 해주시긴 했다. 하지만 그와 버금가게 막말도 본인 감정 위주로 많이 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회사명 oo+독'이라고 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뭔가 속이는 게 있어서 전화를 안 받냐'라고 다그치기도 하고, 착신전환을 해 놓으면, '일부러 본인 전화를 안 받으려고 하는 거냐. 무슨 꿍꿍이냐'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셨다.
홈쇼핑을 하면서, 불량이 난 하자 제품도 내 잘못이라고 하셨고 (홈쇼핑 담당 따로 있고, R&D팀과 무역팀 따로 있는데....) , 인터넷에 고객 불만 글도 다 내 잘못이라고 하셨다. (CS팀장이 따로 있는데..) 마케팅팀이 고객을 알아야 한다며, 전문 영역도 아닌데 CS팀에 가서 콜을 받아야 하는 게 다반사였고, 퇴사 전에는 나보고 마케팅팀 맡지 말고, CS팀 가서 전화나 받으라고 하셨다. CS팀 안 맡으면 나가라고 하셨다. 우리는 항상 우스개 소리로 회사의 일을 웹툰으로 만들면 히트 칠 거라고 했고, 매일 에피소드로 무궁무진할 거라고 했다. 차마 입에 담긴 힘든 일들도 많았고, '너는 여자라서 안돼' '잰 뚱뚱해서 안 돼" "잰 못 배워서 그래" 라는 말도 서슴없이 하셨다.
미운 정은 있을까? 그래도 퇴사한 지 2년이 된 지금, 전 직장 팀원의 부탁으로 그분을 다시 만났다. 본인 때문에 퇴사한 직원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밥 사준다며 만나시고 연락하는 분이다. 사람들은 그분이 돈이 많기 때문에 ‘노후보험’ 들었다 생각하고 계속 연락을 하긴 한다. (잘 구슬리면, 사업 자금 같은 것을 투자하기도 하고, 자기 사업체에 다른 신규 비즈니스 담당이나,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주시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용하기 쉬운 돈 많은 할아버지 같은 거다). 그래도 전 팀원이 같이 나가자는데, (처음엔 우리 둘이서 만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하루 전에 진실을 이야기해줘서, 막상 거절도 못했다. 그 전 날부터 입 맛도 떨어 직고, 약속 자리에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짧은 두 시간 정도의 식사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내가 왜 이 자리에 있고,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무슨 이야기만 하면, "넌 그래서 안된다." "그 회사에서 일하는 게 다 내 밑에서 일 배워서 그런 거다" "겐 그래서 안되고, 잰 저래서 안된다" (퇴사 직원들...) 차라리 날 부르지 말던가.. 회사에서 거의 제일 높은 연봉으로 급상승한 남자 팀장이 있는데, 왜 나한테 와서 그 사람이 쓴 30억 마케팅 비용을 나보고 30% 깎을 수 있는지 보고 싶다고 하는 건지.... 우리 때보다 거의 2배 이상 쓰던 금액을...(우리 때는 그렇게 쓰라고 하시지도 않았는데..) 정말 기가 찼다. 그리고 왜 말투마다 날 평가하고, 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훈수를 두지? 그분은 이제 그럴 권한도 없는 분인데... 사람의 자존감을 떨어지게 하는 그분, 그리고 그 회사에서의 힘들었던 시간들을 아직도 돌아보면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퇴사 후 2년이 지나, 이제는 내가 괜찮을 거라 생각한 나의 실수, 그나마 그분이 변했을 거라 생각했던 착각,...조금은 그분이 사람 대하는 게 나아졌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말 1점 때인 잡플래닛 평가는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씁쓸하면서 화가 나는 하루.
나 자신에게 좋은 경험만 하게 하는 것도 나 자신을 위해 내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오늘 하루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불편한 자리는, 아예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인생 낭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