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성호 Jul 18. 2016

가끔은 휴게소에 들러라.

멈추어야 비로소 돌아볼 수 있다.

한 국립공원의 A계장은 추석 전후의 9월만 되면 어김없이 연차와 월차를 붙여 보름가량 휴가를 낸다. 7월과 8월의 극성수기를 지내고 나면 아무리 20년차의 베테랑 A계장이라도 일에 치이고 지치기 마련이다. 휴가기간 동안 A계장은 산으로 송이버섯을 따러 간다. 귀할 때는 그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송이버섯이지만, 그에게는 송이버섯의 가치보다 그것을 찾기 위해 이 산 저 산을 누비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매일 오르내리는 산과 다르지 않지만, 일 때문에 오르내리는 산과 송이버섯을 따기 위해 오르내리는 산은 그에게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이다.


“강사님은 항상 재미있는 강의를 하시는데, 강사님 삶도 그렇게 재미있으신가요?”


국내 최고의 명강사, 김창옥 교수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이다. 재미와 감동이 있는 강의로 유명한 김창옥 교수이기에, 모든 청중들은  항상 재미있는 강의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충은 있었다. 아버지의 대장암 판정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재미있는 강의들을 해내야 하는 역할 때문에, 강의 6년차 즈음엔 강사로서 최대의 위기가 왔다.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파는 강의를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은퇴한 노 신부의 권유로 프랑스의 수도원에 다녀오게 된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2주 간 산책과 사색을 통해 그는 그의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그 2주간의 시간이 다시 그의 일상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았다.


2008년 겨울, 나는 강원도 인제의 한 부대 면회실에 앉아있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취직한 회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최고의 성과를 올리고 있던 시기에, 고향집에 불이 나서 집이 몽땅 타버리는가 하면,왼손 엄지손가락이 잘리는 사고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어야만 했던 힘든 시기였다. 고향 충주로 바로 내려가야 했지만, 이대로 내려갔다가는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할 것만 같았다.


“10중대 1소대 2분대장 면회 왔습니다.”


2001년 겨울의 주말, 누군가 나를 면회 왔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A급 전투복을 갈아입고 면회실로 향했다. 내심 예쁜 아가씨가 면회 왔으면 하는 바람과는 달리, 덥수룩한 수염의 아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년 전에 10중대 1소대 2분대장이었다고 한다. 지나가다가 갑자기 옛 생각이 나서 들렀다고 했다. 귤 2박스, 치킨 3마리, 피자 3판을 사서 온 그와의 대화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짠한 무언가를 느꼈던 기억이다. 그리고 2008년의 겨울 나도 그처럼 지금의 2분대장을 찾아왔다.

어깨 위의 녹색 견장만큼이나 당당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눈빛의 청년이었다. 그렇지만 20대의 풋풋함은 그 강인한 눈빛으로 숨길 수 없었다.


“전역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이 없습니다.”


강단 있는 눈빛과 달리, 전역 이후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에게 어줍지 않은 조언들을 해주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바깥 세상이 그리 힘들지만은 않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와의 만남 이후, 당당히 고향으로 내려갈 용기가 생겼다.


어디로 가야할 지, 왜 가야할 지 의문이 든다면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아무 생각없이 속력만 내고 있다가는 오히려 그 속력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고속도로지만, 가끔은 휴게소에 들러 사람도 차도 돌아보아야 더 안전하고 빠르게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