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충격과 약간의 부끄러움
평소라면 학교 수업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나서 가방을 현관에 벗어던지듯 던지고 신발도 벗기 전에 "다녀왔습니다!"를 외치며 뛰어들어오는 아이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묵직한 정적이 느껴졌다. 아이의 표정은 유독 시무룩했고, 말도 없이 조용히 소파에 푹 엎드려버렸다. 마치 에너지가 다 빠져버린 것처럼.
"너 왜 그래?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오늘 학교에서... 분수 문제 풀어보라고 했는데... 틀렸어."
"아, 그랬구나. 괜찮아. 공부하면 돼. 우리 같이 해보자."
"... 응."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산더미였다.
"그래서 몇 개 틀렸는데?",
"분수 중에 뭐가 헷갈렸어?",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
"친구들도 다 틀렸대?" 등등...
머릿속에 수십 개의 질문이 떠올랐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아이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 속은 불이 났다. 우리는 복화술이라도 하듯 눈빛으로만 대화를 주고받았고 아이가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뒤 몰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떡하지? 학교에서 시험 봤는데 아예 못 푼 거 같아."
"시험? 그냥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 내고 풀어보라고 한 거 아닐까?"
"... 그런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마음을 닫을까 봐, 괜히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상처를 남기면 어쩌나 싶어서 우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우리 때는 이랬다더라는 감으로 모든 걸 추측하고 넘어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수학이 무서워졌고 "나는 수학을 못하는 애야"라는 생각이 내 안에 뿌리내리던 시기였다.
수. 포. 자의 씨앗은 그렇게 슬며시 심어지는 거니까.
우리는 고민 끝에 근처 학원을 알아보고 급하게 레벨 테스트 예약을 넣었다. 내일까지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그날 저녁, 당장 가능한 학원으로 향했다.
아이는 별말 없이 다른 방에서 레벨 테스트를 보기 시작했고 우리는 상담실에서 원장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오늘 학교에서 아이가 분수 문제를 다 틀렸다고 하더라고요."
"수학은 원래 좀 어려워했어요. 그래서 지금 안 잡아두면 아예 놓칠까 봐요..."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우린 괜히 먼저 나서서 고해성사라도 하듯 이야기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니, 어쩌면...
혹시라도 아이가 테스트를 못 봤더라도 같은 또래 친구들과 그냥 공부라도 같이 할 수 있도록 학원 측의 마음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1시간 가까이 마치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어머님, 아버님. 아이 테스트 마쳤습니다!"
"집중력도 좋고, 연산도 굉장히 탄탄해요."
"틀린 문제도 있지만, 맞은 문제도 훨씬 많아요."
시험지를 받아본 순간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 봤다. 그 안에는 묘한 충격과 약간의 부끄러움이 함께 있었다.
'이 정도로 잘하는데... 왜 우린 이렇게까지 오버했지?'
아이는 사실, 분수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은 그냥 한두 문제 틀렸고 그게 좀 속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마디만 듣고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를 써버렸다.
불량학생처럼 학교 수업시간에 껌이나 씹고 있는 애처럼 우리 아이를 상상하고 있었던 거다.
님아, 그 말을 내뱉지 마오.
"우리 애, 수학 진짜 약해요."
"이런 걸 아예 못 풀어요."
"지금 안 하면 진짜 큰일 나요."
그 말들은 사실 아이에게 한 말이 아니라 불안한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주문이었을지 모른다.
아이는 잘하고 있는데 또 괜한 말을 했나 싶다. 우리말을 안 들었길 바란다. 조금은 늦었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먹어보자.
아이는 믿는 만큼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