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마디면 됐는데
우린 정말 대단한 말과 문자를 갖고 있다. 세종대왕 만세다. 그분이 만든 '한글' 덕분에 우리는 작은 자모의 조합만으로 거의 모든 소리를 적는다.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무엇보다 아름답다. 배우긴 어렵지만 한 번 익히면 쓰임이 대단하다. 영어처럼 F냐 P냐로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일본어처럼 한자 때문에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문자와 언어를 쓰는 우리에게도 이상하게 어려운 표현이 있다. 바로, 감정을 부드럽게 던지는 한마디다.
일본 사람들은 "스미마센(すみません)"으로 말을 시작하고, 진짜 미안할 땐 "고멘/고멘나사이(ごめん/ごめんなさい)"를 자주 쓴다. 그게 진심이든 형식이든, 순간의 공기는 부드러워진다. 영어권 사람들도 "Sorry" 나 "Excuse me"를 습관처럼 꺼낸다. 짧지만 대화의 윤활유가 된다.
한국어에도 사실 완충 표현이 많다. "죄송합니다/실례합니다/잠시만요” 같은 말들.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습관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미안해'를 아낀다. 그 한마디를 꺼내는 순간 왠지 지는 것 같고, 체면이 깎이는 것 같다. 그래서 농담과 제안, 보상으로 돌아 들어가곤 한다.
그날 밤, 나도 그랬다.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수학 학원과 수영까지 투정 없이 다녀왔다. 숙제도 스스로 몇 장을 해냈다. 기특해서, 나는 섣불리 약속을 했다.
"오늘은 10시까지 쭉 놀자."
문제집을 덮고 아이가 달려왔다. "좋아! 이제 놀자!"
열심히 했을 땐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맞다고 믿었고, 그날은 나도 기분이 좋아서 순간적으로 약속을 해버렸다.
저녁을 먹고, 아이와 함께 가정통신문을 보는데 내일 사회 2단원 단원평가가 예정되어 있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 사회 공부 좀 더 하다 자야겠는데? 대신 내일 더 많이 놀자."
아이는 금세 얼굴을 찌푸렸다.
"10시까지 놀기로 약속했잖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건 그런데, 내일 시험 보는 건 몰랐어? 뭐가 그렇게 당당해?"
지금 생각하면 그럴 일도 아닌데 괜히 짜증이 확 올라왔다. 그때 그냥 웃으면서 말했어도 아이는 충분히 이해했을 거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이는 멈춰 섰다. 어이없고, 서운하고, 믿기지 않는 얼굴.
“그렇다고 시험 준비를 안 할 수는 없잖아.”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아이는 식탁에 앉아 사회 교과서와 문제집을 펼쳤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스탠드 불빛만이 공간을 비췄다. 아이의 숨소리가 낮고 고르게 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약속을 깬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그때 “미안해" 그 한마디면 됐는데...
나는 괜히 분위기를 풀어보겠다며 "내일 더 많이 놀자~" 같은 쓸데없는 말로 얼버무렸다. 변명은 사과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대답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말에도 충분히 부드러운 말들이 있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아이에게 그 말을 쓸 용기가 없었다.
그저 내 탓이다.
'미안해'는 지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말인데도.
다음엔 꼭 말해야지.
'쏘리'도 '스미마센'도 말고, 우리말로...
"미안해."
님아,
님은 절대로 그 말을 내뱉지 마오.
미안하다는 한마디면 될 걸,
괜히 내일 더 놀자거나
내일 많이 놀자는 말로 얼버무리지 마오.
그 말들은 위로가 아니라
약속을 잃은 사람의 변명일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