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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명절이었다

한 가지만 빼면

by 피터의펜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다. 우리는 당일날 아이들을 데리고 마음은 가볍게, 양손은 무겁게 친가와 외가를 하루 만에 모두 다녀왔다. 다행히도 우리 집을 기준으로 거리는 멀지 않은 편이라 살짝만 긴장감을 유지하면 하루에 두 집 방문 미션도 가능하다.


게다가 도로까지 잘 뚫렸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명절이고 귀성길이었다.


전날 밤부터 내 머릿속은 이미 '작전 모드'였다. 기름은 가득 채웠고 타이어의 공기압 확인, 워셔액 보충까지. 자동차는 거의 새 차 수준으로 달릴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자동차만 잘 챙긴다고 끝이 아니다.

아이들도 준비가 필요하다.


아이들은 옷이 불편하면 몸이 아니라 마음까지 삐딱해진다. 종일 짜증을 부리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밤늦게 옆집에 미안하다는 눈치를 흘리며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렸다. 출발 당일 아침에 '좋아하는 옷'이 빨래통에 들어있다면 그날은 이미 망한 날이 될 테니까.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이유는 하나다. 멀리 사는 것도 아닌데 평소에 자주 찾아뵙질 못하니까. 이럴 때라도 깔끔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싶다.


불가항력이나 천재지변, 혹은 '심통방구' 같은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오늘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처음 결혼했을 땐 모든 가족 생일, 행사, 기념일을 챙기고, 모이고,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10년이 넘게 흐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젠 중요한 일 외에는 서로 간소하게, 최적화된 방식으로 안부를 나눈다.


그래서 이번 명절 방문은 더 의미 있었다.


유독 2025년은 내게 정신적으로 가혹한 시기였다. 그렇게 바빴던 것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부모님 댁에 전화를 드리는 것도, 한 번 찾아뵙는 것도 자꾸만 뒷전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엔 정말 더 잘하고 싶었다. 용돈도 예년보다 10만 원을 더 준비했다. 그날 아침, 은행 CD기에서 미리 5만 원권으로 뽑아뒀다. 이마저도 늦게 가면 1만 원권으로 나오는데 그날은 일찍 가길 참 잘했다.


출발 전, 나는 아주 단호하게 외쳤다.


"하나도 빠뜨린 것 없이, 완벽하게 준비했어."

"이 정도면 진짜 흠잡을 데 없다!"


스스로에게 셀프 박수도 쳐줬다. 기민하게 움직인 나 자신에게, 그리고 조용히 옷을 잘 입고 따라온 가족에게 약간의 요란함을 감수하고라도 칭찬을 퍼부었다.


그렇게 부모님 댁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뭔가 이상했다. 묘하게 허전하다.


차 안은 조용하고, 공기는 평온한데...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비어있는 느낌이다.


그때 주머니 속 현금을 꺼내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봉투...!!!"


황금색 바탕에 "부모님 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캘리그래피로 적혀 있던 빛나는 그 봉투. 며칠 전, 아트박스까지 가서 어렵사리 골랐던 그 값비싼 명절 전용 봉투를 집에 두고 온 거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건만 결국 확인하지 않은 딱 한 가지가 실수로 이어졌다.


심지어 나는 "하나도 빠뜨린 게 없어!"라는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에게 잘못된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급하게 대체할 봉투를 찾아봤지만 남아 있는 건...


부의금 봉투

결혼 축의금 봉투

행 봉투

... 세 종류.


화이트로 지우고 재사용할 수도 없고 용도에도 맞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을 애써 준비한 봉투 내버려두고 '농협 봉투'에 담아서 드리자니 괜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결국


"저 커피 좀 사 올게요!"

라고 외친 뒤 조용히 편의점까지 10분을 걸었다.


비닐 가방 속에 700원짜리 무지 봉투를 넣은 채 다시 부모님 댁으로 돌아오며 오늘 하루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췄다.


누가 봐도 사소한 실수고 누가 뭐라 하시지도 않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한 번만 더 확인했더라면 그 황금빛 봉투가 지금 내 손에 있었을 텐데.


그래도 10만 원을 더 넣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앞에서 돈을 세지는 않으셨지만 감으로 아신 듯했다. 올해 부모님 얼굴이 유난히 함박웃음이셨다.


님아, 그 말을 내뱉지 마오.


"이번엔 진짜 하나도 안 빠뜨렸다."


그 말은 당신을 편의점까지 뛰게 만들지 모른다.


그리고,

멋진 아트박스 봉투는

다음 설날까지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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