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는 마음

꽃보다 오래, 계절을 견디는 법

by 피터의펜

동네에 오래 살다 보면, 오며 가며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중에는 인사만 하는 사이도 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는 특히 꽃집 사장님과 가까웠다.


그 인연의 시작은 우연처럼 다가왔다.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 날, 꽃다발을 사러 갔는데 유치원 앞에는 꽃을 파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급히 동네를 헤매다 발견한 작은 꽃집... 거기서 산 한 다발의 꽃에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그 꽃집에 자주 들렀다. 새로운 꽃이 들어오면 구경하고, 귀여운 식물이 보이면 데려와 베란다 한편에 두었다. 모르는 건 물어보고,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렇게 '꽃을 기르는 재미'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식물도, 흙도, 물 주기도 모두 낯설었지만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매일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시간이 쌓이자 우리 집 베란다는 작은 정원이 되었고, 나는 그곳의 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택으로 이사 오고 나서는 꽃보다 나무에 마음이 갔다. 화분 크기만큼 제한된 베란다에서 꽃을 키우던 시절을 지나, 흙이 가득한 마당을 얻게 되자 시선이 훨씬 멀리 뻗어나갔다. 아파트에선 거실 창을 가리지 않을 만큼의 작고 단정한 식물을 찾았지만, 이제는 크기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대신 고민의 기준이 달라졌다.

'이 나무가 우리 집 풍경 속에서 어떤 스토리를 만들까.'


꽃은 예쁘지만 짧고, 나무는 계절을 견디며 자란다. 이상하게도 그 단단함이 좋았다.


처음엔 나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지나가다 밟으면 냄새나는 은행나무, 봄에만 예쁘게 피는 벚꽃나무 정도만 알았다. 그러다 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들른 화원에서 쟁반처럼 가지가 넓게 퍼진 반송 소나무를 발견했다. 작고 둥글둥글한 모양이 귀여워 그 자리에서 데려왔다.


마당 한가운데에 심은 소나무는 작지만 위엄이 있었다. 햇살에 솔잎이 반짝이고, 가까이 다가서면 솔내음이 진하게 풍겼다. 그 향을 맡을 때마다, 이곳이 진짜 우리 집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그 뒤로 주말마다 화원을 돌며 나무 구경을 했다. 처음엔 단순한 구경이었지만, 어느새 나무를 보는 눈이 생겼다. 화원에는 수많은 나무가 서 있다. 어떤 건 유난히 반듯하고, 또 어떤 건 삐딱하지만 묘하게 멋스럽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시선은 한결같았다.

줄기가 일자로 뻗은 나무. 그런 나무가 가장 먼저 팔리고, 금세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줄기가 굵을수록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나무의 세계에도 결국 균형과 완벽을 좇는 인간의 욕망이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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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랬다. 반듯하고 가지가 고운 나무만 찾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나무를 고른 게 아니라 그 나무가 놓인 풍경 속 이미지만 고르고 있었던 것 같다. 잘 가꾸겠다는 마음보다 예쁜 나무, 보기 좋은 마당만 생각했다. 나무를 바라보며 내 모습을 의식하느라 정작 그 생명력을 놓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조금 더 오래 화원을 다니다 보니 진짜 매력은 다른 데 있었다. 줄기가 휘어 있더라도, 바람에 꺾였다 다시 선 흔적이 있더라도 그 나무에는 시간과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우리 집에 오면 잘 살겠다"는 느낌이 드는 나무가 꼭 있었다. 그걸 알아보는 순간, 나무를 고르는 일은 쇼핑이 아니라 관찰과 이해의 과정이 되었다.


화원을 돌며 깨달았다. 좋은 나무를 고르는 법은 결국 사람을 대하는 법과 같다. 너무 반듯한 것만 찾지 말 것. 모양이 좀 부족해도 여러 방향으로 고루 자란 나무가 오히려 오래간다. 햇빛을 향해 스스로 방향을 트는 나무는 강하고 유연하다. 그런 나무가 오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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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새 나무를 사러 가도 굳이 예쁜 것만 고르지 않는다. 조금 휘어도, 옹이가 있어도 괜찮다. 그건 흠이 아니라 자라온 시간의 증거다. 어쩌면 나는, 풍파를 견뎌낸 나무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 새 나무를 심을 때면 항상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뇐다.

"잘 자라라. 그리고 네가 자라는 동안, 우리도 자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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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꽃보다 나무가 좋다. 잠깐의 화려함보다 묵묵히 계절을 버티는 힘이 좋아졌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심은 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맞대어 그늘을 만들어줄 날을 꿈꾼다. 그때쯤이면 우리 가족도, 분명 조금은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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