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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 3만 원, 그리고 아빠의 오기

아이의 미소만 남고, 잔액은 사라졌다

by 피터의펜

초등학생 아들 손에 이끌려 먹자골목 입구의 인형 뽑기 방으로 들어간 40대 남성 A 씨.

입장 20분 만에 전 재산 3만 원을 탕진했다.

손에는 인형이 들려 있었지만, 표정은 허탈했다.


얼핏 강원랜드에서 일어난 일 같지만, 아니다.

철저하게 내 얘기다.


아침부터 아이가 미열을 보였다.

기운이 없어 보이길래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하루 쉬기로 했다. 꾀병인지 진짜인지 늘 헷갈리지만, 그래도 아파 보일 땐 하루쯤 쉰다.


우리 세대처럼 "아파도 학교는 가야지"라는 말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니까.


대형마트 4층에 있는 소아과에 들러 약을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선을 옆으로 조금만 돌리면 나오는 먹자골목 입구를 지나가던 그때,

아이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불빛을 번쩍이며 돌아가는 인형 뽑기 기계들.


아이의 손이 내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꽤나 자연스러우면서도,

묘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문을 열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 핑계였다.

어쩌면 왕년에 인형 좀 뽑던 내 실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예쁜 인형을 뽑아주면 아빠 점수도 오르고,

쿠팡에서 사는 것보다 싸게 먹힐 수도 있겠다는 계산까지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이미 잘못이었다.


"딱 3천 원어치만 해보자."


그 말을 건네자마자, 녀석은 가게 안을 세 바퀴나 돌았다.


무슨 인형을 뽑고 싶어 저러나 싶어 지켜봤는데, 결국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푸른 호랑이 인형 앞에 멈췄다. 기괴하게 웃고 있는 인형의 얼굴이 꽤 인상적이었다.


'호랑이?'


나는 살짝 의아했다.

우리 세대에게 호랑이는 '해님달님'에서 엄마 흉내 내다 애를 잡아먹는 괴물 아닌가. 정글북의 흑표범이라면 몰라도, 내게 호랑이는 여전히 악역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빛을 보니 말릴 수가 없었다.


"이거 꼭 뽑고 싶어."


그 말을 하고 정확히 1분 만에 3천 원이 사라졌다. 집게가 인형을 잠깐 들었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결국 인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실망한 표정을 보니, 오히려 내 오기가 생겼다.


이게 뭐라고 괜히 뽑아주고 싶은 거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쯤에서 멈췄어야 했다.

인형 뽑기 방 사장님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돈을 더 쓴다고 뭐가 달라질 리 없었다.

그런데도 괜히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때, 내 안에서 오래된 기억이 깨어났다.


'감 is back'


그리고 나는 결국,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한 번만 더 하면 되겠는데? 정말 딱 한 번만."


나는 확신에 차 있었고, 아이는 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언제부터 아빠 말을 이렇게 철석같이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나를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천 원.

또 천 원.

또, 또 천 원.


그렇게 쓰다 보니 3만 원.

인형 뽑기 방에서 말이다.

그것도 20분 만에.


미쳤지, 내가. 미쳤어.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이템 뽑기 게임에 돈 낭비하는 애들을 보며 잔소리하던 내가 지금 똑같이 앉아서 돈을 태우고 있었다.


아이도 이제는 기대를 내려놓았는지,

조금 진정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때다 싶어 "이번 판까지만 하고 정말 그만하자.

차라리 아빠가 사줄게."라고 말한 직후,

기적처럼 인형이 하나 딸려 나왔다.


그때 잠시, '혹시 사장님이 내 불쌍한 얼굴 보고 선물로 내려준 거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아이는 신났다.

인형을 트로피처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빠 최고!”


그 웃음 한 방에 허탈함이 녹았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씁쓸했다.


기계가 나를 턴 게 아니다.

내가 스스로 주머니를 털었다.


가게를 나서며 말했다.


"다음엔 인형 뽑기 말고 교보문고 가자."


아이는 "좋아!"라며 또 환하게 웃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호랑이는 악역이 어울린다.


님아,

그 말을 내뱉지 마오.


"한 번만 더 하면 되겠는데."


그 한마디가

당신의 전 재산을 삼켜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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