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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마불의 법칙

승자는 사라지고, 눈물만 남았다.

by 피터의펜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보드게임을 하려고 거실에 둘러앉았다.


TV를 켜봐도 딱히 볼 만한 콘텐츠는 없었다.

넷플릭스를 틀었다가 쿠팡플레이로, 거기서 또 디즈니로, 그러다 다시 티빙으로...


채널을 돌리고 또 돌리며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결국 내가 말했다.


"그만 돌리고, 우리 그냥 같이 보드게임이나 할까?"


그렇게 시작된 건, 가족 보드게임 대전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책꽂이에 꽂혀 있던 '월리를 찾아라'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함께 즐기던 놀이였고, 규칙은 간단했다. 책을 펼쳐놓고 먼저 월리를 찾는 사람이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이긴다고 상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작은 '선택권'이 주어졌다. 예를 들어 저녁 메뉴를 고르거나, 엄마 팔베개를 차지한다거나, 다음 게임을 고르는 권한 같은 것들이다.

이 사소한 선택권 하나가 가족 게임의 최대 권력이다.


보통은 여기서부터 아이들의 감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다음 게임은 무엇으로 할까'가 문제다. 서로 잘하는 게임, 그리고 좋아하는 게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권력을 쥔 사람은 왕이 되고, 나머지는 복종해야 한다. 그 절대권력을 오늘은 첫째 아이가 쥐게 된 거다.




요즘은 초등학교 교실마다 다양한 보드게임이 구비되어 있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부루마불, 젠가, 루미큐브 같은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우리보다 규칙을 더 잘 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규칙이 '공식 룰'이 아니라 교실 안에서 아이들끼리 만들어낸 '변형 룰'이라는 점이다.


그게 때로는 게임의 재미를 살리기도 하지만,

가족끼리 하면 꼭 싸움의 불씨가 된다.


우리도 그랬다. 바로, 그 악명 높은 부루마불.


이 게임은 내가 어릴 적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기억이 있을 정도로 오래된 보드게임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아직도 팔리고, 리메이크 버전까지 나올 정도로 꾸준하니 어쩌면 한 세대를 통과한 우리 세대의 유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규칙이 달랐다.

아이들이 각자 학교에서 배운 '자기들만의 부루마불'을 가져온 거다.


"누나, 서울이랑 부산이랑 제주는 하나만 살 수 있어."

"그런 룰이 어딨어? 설명서에 없는데?"


나는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다.


"빌딩은 한 칸 당 하나만 올릴 수 있어."

"아빠, 얘 지금 이기려고 자기 멋대로 하는 거야."


또다시 침묵.

또다시 판 위의 전운이 감돈다.

이 순간은 정말 싸늘하다.


가족이 하는 게임이 언제나 그렇듯, 승패보다 감정이 먼저 흔들린다. 사실, 처음에 내가 규칙을 명확히 정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어쩌면 이 싸움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나이 차이만큼, 게임 이해력에도 격차가 있었다.


큰아이는 계산이 빠르고 판단이 정확하다.

가짜 돈을 세는 속도는 거의 은행원 수준이고,

황금열쇠에서 세금을 계산하는 손놀림은 칼 같다.


반면 둘째는 아직 저학년이라 매번 주사위 수부터 세어야 하고, 지불 금액은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


아마 그래서 학교에서는 계산을 단순화하고, 건물 수를 제한하거나 특정 지역을 사지 못하게 만드는 '쉬운 버전'을 즐겼던 것 같다. 그 규칙이 집에서도 그대로 발동된 거다.


그날도 나는 둘째를 조금 도와주려고 몇 번이나 바보연기를 해대며 주사위를 바꿔 던지고, 일부러 땅에 걸려주기도 하고, 통행료를 몰래 더 얹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큰아이의 눈썰미는 예리했다.


"아빠, 지금 봐줬지?"

"아니, 그냥 운이야."


그러자 둘째는 울먹였다.

"누나가 나 놀려. 안 할래."


큰아이도 지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해. 그냥 가위바위보로 끝내버려."


결국 둘 다 울었다.


나는 게임판을 조용히 정리해서 책장의 제일 높은 칸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도 그 게임을 꺼내지 않았다.


그 뒤로 '부루마불'은 우리 집의 금기어가 되었다.

그 이름만 나와도 가족 중 누군가 한숨을 쉬는, 그런 게임이 되어버렸다.




"우리 부루마불 하자."


첫 번째 게임인 '월리를 찾아라'에서 이긴 첫째 아이가 기어코 그 금기어를 다시 꺼내버렸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때의 악몽이 흐릿해진 탓인지, 이 한마디가 불러올 후폭풍을 잊은 모양이었다.


순간 많은 고민이 스쳤지만,

왕이 게임을 고르기로 한 것도 규칙이니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다 컸으니까 괜찮겠지."

"좋아! 오랜만에 부루마불 한 판 해보자."


그리고 10분 뒤,

그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약속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번엔 계산 때문이 아니라, '황금열쇠 카드' 때문이었다.

큰아이는 '부산 여행권'을 뽑아 환호성을 질렀고,

작은아이는 '병원비 5만 원 지출'에 울상을 지었다.


"이건 불공평해!"

"너 바보야? 그게 룰이야."


그 짧은 대화한 줄이 또 싸움의 시작이었다.

결국엔 또, 둘 다 울고 끝나버렸다.


아, 정말 지독하리만치 정확한 부루마불의 법칙이다.


나는 그 순간, 왜 매번 이런 사소한 일에서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는지 생각했다.

승패보다 중요한 건 함께 웃는 건데, 막상 게임이 시작되면 '누가 더 잘했는가'에 마음이 끌린다.


이 게임의 재미란, 결국 상대를 곤경에 빠뜨려 파산하게 만드는 것.

그러니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뒤 조용히 거실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부루마불은 가족의 화목을 다지는 게임이라기보다,

환란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할지를 보여주는 작은 시험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결국에는 다시,

책장의 가장 높은 구석으로 집어넣었다.

아래에서는 올려다보면 보이지 않게끔 말이다.


20251025_201803.jpg


님아, 그 말을 내뱉지 마오.

"오랜만에 부루마불 한 판 해보자."


그 말은 언제나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그게 바로, 우리 집 부루마불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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