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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박사가 너무 많다

꿈은 이뤄지긴 한다, 방향만 다를 뿐이다.

by 피터의펜

요즘 길 가는 초등학생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절반은 의사, 나머지는 유튜버라고 한다.


둘 다 돈을 잘 번다. 물론 어디 통계청에서 조사한 건 아니고, 우리 아이 친구들이나 주변 애들한테 틈틈이 물어서 얻은 정보다. 공신력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근거 없는 건 아니다.


"임마야,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장의산데예."

"건달입니더."


영화 친구의 유명한 대사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예전엔 진짜 그랬다. 학교에 가면 호구조사가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계신지, 초혼인지 재혼인지, 자가인지 전세인지까지 묻던 시절.


그런데 나에게 더 어려웠던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장래희망' 칸을 채우는 일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땐 별생각 없이 '대통령'이라 썼다. 고맙게도 우리 부모님은 진짜로 그렇게 써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내 황당한 말을 흘려듣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믿어준 셈이니까.


귀가 유독 크고 통통했던 탓에 동네 어르신들은 내 귓불을 부처님 귀처럼 만지며 늘 말했다.

"고놈, 귀 참 잘 생겼네."

"대통령 귀여."


그렇게 나의 첫 장래희망이 생겼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의 부모들이 아이를 의사로 키우고 싶어 하는 마음도, 그때의 어른들과 다르지 않겠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스스로 쓴 꿈은 '박사'였다.

솔직히 그땐 몰랐다.

박사가 되려면 대학원에서 청춘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 시절 내가 생각한 박사는 '김박사', '남박사', '동방박사'였다. 흰 가운을 입고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멋진 어른. 나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5학년 가정환경조사 때, 나는 내 손글씨로 '박사'라고 써넣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내 꿈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진득하게 앉아 있질 못하는 성격 탓에 결국 학사에서 멈췄다. 그래도 그 시절의 박사 꿈만큼은 진심이었다.


어제 통근버스에서 일어난 일이다.

옆자리에 앉은 직장 동료가 다급하게 내 팔을 확 잡아당겼다.

"형 괜찮아?"

"야... 버스 세워야 될 것 같은데 어쩌냐..."


이 형은 나보다 네 살 많은데, 평소엔 침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엉덩이를 의자에서 살짝 띄운 채, 왼손으로는 내 팔을, 오른손으로는 자기 배를 붙잡고 있었다.


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아... 그런 거구나.'


배에서 SOS를 치는 중이었다.

가방을 뒤져도 검정색 비닐봉지는 없었고, 휴지도 없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그를 진정시키는 일뿐이었다.


"형, 내 눈을 똑바로 봐."

"응, 보고 있어..."

"이제 고속도로 들어왔어. 어차피 버스 못 세워."

"알았어..."


"형, 참아야 돼. 이제는 진짜 형의 의지야."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계속 말했다.


"자세가 틀렸어. 지금 배를 꽉 쥐고 있잖아. 물호스를 꽉 쥐면 물이 더 세게 나가잖아?"

"... 그렇지."

"그러니까 배를 펴고 버텨. 그래야 응아가 내려가는 걸 막을 수 있잖아."

"아, 그렇네..."


초등학교 시절 과학만화로 배운 지식을 총동원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박사'의 꿈이 이런 데서 빛을 발할 줄은 몰랐다.


형은 자세를 바꿔 등을 등받이에 기대고,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명상이라도 하듯 미동이 없었다.

버스는 마치 신들린 듯 모든 신호를 피해 달렸다.

기사님도 상황을 느꼈던 걸까.


회사에 도착해 내릴 때, 형은 기사님에게 인사를 했다.

"기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회의를 마치고 퇴근하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내장박사. 고맙다. 커피 한잔하고 가."


순간 웃음이 터졌다.

내장박사라니.

하지만 그 별명, 싫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꿨던 꿈이 문득 떠올랐다.

박사가 되고 싶다던 그 시절.


결국 나는 박사가 되긴 했다.

누군가의 장을, 그 절박한 순간을 도와준 '내장박사'로 말이다.


꿈은 이뤄지긴 한다.

다만 방향이 문제일 뿐이다.


님아, 그 말을 내뱉지 마오.

세상은 종종 우리가 던진 말을 끝까지 기억해둔다.

그리고 아주 엉뚱한 순간에, 그 말을 현실로 돌려준다.


그러니 함부로 박사가 되겠다고 말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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