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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해골바가지

오늘은 손톱 대신 마음을 다듬었다

by 피터의펜

기타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달라진 게 손톱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진짜 그렇다.

예전엔 그냥 길면 깎고, 짧으면 내버려 뒀는데 요즘은 '오늘 깎으면 수요일 수업엔 길이가 맞을까?' 같은 생각을 한다. 기타 연습은 대충 하면서 손톱은 스케줄링하는 기묘한 인생이다.


첫 수업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손 좀 보여주세요."


순간, 괜히 긴장됐다. '위생검사라도 하나?' 싶었지만 그냥 조용히 손등이 위로 가게 쫙 펼쳤다.


"오, 잘 깎으셨네요."

"네?"

"왼손이요. 손톱을 아주 잘 다듬으셨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쑥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손톱을 바짝 깎는 게 습관이었다. 조금만 길어져도 거슬리고, 손끝이 둔탁해지는 느낌이 싫었다. 주변 사람들은 늘 '그렇게 깎으면 아프지 않냐'라고 했는데 그 습관이 여기선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덧붙였다.


"그런데요, 오른손은 좀 기르세요. 아르페지오 할 땐 손톱이 약간 있는 게 소리가 좋아요."


그날부터 손톱 관리가 시작됐다. 왼손은 그대로 짧게 유지하면 됐지만 오른손은 이야기가 달랐다.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거슬리는데, '소리를 위해 길러야 한다'니 참 아이러니였다.


그래도 비교는 해봐야 했다. 손톱을 조금 기르고 아르페지오를 쳐봤다. 손끝이 현을 스칠 때 확실히 소리가 달랐다.


맑고 부드러웠다.


손톱이 줄을 긁고 지나가며 남기는 '슥-' 하는 감촉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 이래서 손톱이 중요한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불편함은 참을 수 없었다. 손끝이 걸리고, 스마트폰 터치도 이상하고, 손톱 밑은 금세 지저분해졌다. 결국 며칠을 못 버티고 다시 바짝 깎았다. 역시 손톱은 짧아야 속이 편하다.


그날 수업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그럼 아르페지오도 피크로 많이 연습하세요."


그 말에 멍해졌다. '그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손톱을 못 기르겠으면 피크에 적응하면 된다. 이왕이면 이번 기회에 피크로 아르페지오를 익혀보기로 했다.


바로 그때 옆자리의 머리 긴 아저씨가 피크를 하나 내밀었다.


"이걸로 쳐보세요."


피크엔 해골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물방울 모양에 ‘HEAVY METAL’이라고 새겨진 글씨.

내가 쓰던 삼각형 피크보다 단단했고, 묘하게 손에 착 감겼다.


딱 봐도 고수의 냄새가 났다.


"형아가 일렉기타 쳐서 준 거예요."


그 말 한마디에 괜히 웃음이 났다. 이 사람도 나처럼, 누군가에게 배우며 음악을 이어가는 중이라는 게 느껴졌다. 동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피크로 아르페지오를 쳐봤다. 이상하게 줄이 덜 걸리고, 소리도 또렷해졌다. 손끝의 반응이 정확했고, 줄이 튕겨 올라오는 탄력도 달랐다. 놀라운 건, 해골 문양이 그려진 피크로 치는데 소리는 오히려 포근하게 울렸다는 거다.


결국 기타라는 것도 사람 마음처럼 섬세한 균형 위에 있는 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톱을 깎았다. 양손 다 바짝.

이번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동안 손톱 길이를 재며 살던 내가 괜히 우스웠다.

손톱은 역시 짧아야 제맛이다.


대신 아르페지오를 칠 땐 해골 피크로 한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며칠 뒤, 그 피크는 내 기타 케이스 안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연습 전마다 그 피크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고맙다, 해골바가지."


진심이었다.

어쩌면 그 피크가 기타를 배우는 내 생활에 처음 찾아온 작은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손톱이든, 피크든, 결국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다.

그걸 쥔 손의 리듬, 그 손이 담고 있는 이야기다.

소리라는 건 결국 마음이 지나가는 통로니까.

오늘은 그걸 조금 더 알게 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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