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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 칠래요

그래도 음악은 흐른다

by 피터의펜

요 며칠은 기타를 손에서 놓았다.

핑계를 대자면 회사일이 좀 바빴고, 아이의 시험기간이 겹쳐 학원 일정에 따라다니다 보니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하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됐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요즘은 괜히 피곤했고 이상하게 손이 안 갔다.

거실 구석에 세워둔 기타는 며칠째 같은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루라도 연습 안 하면 손끝이 허전했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그냥 내버려 뒀다. 처음엔 '게으름'이라 생각했다.


"이러다 손이 굳는 거 아닌가. 코드도 까먹겠는데."


걱정을 하면서도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첫 두 달은 참 신났다. 새로운 걸 배우는 기쁨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잠깐의 착각이었겠지만, 뒤늦게 숨은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아 혼자 들떠 지냈다. 학원 수업 날이 기다려지고, 선생님이 한마디라도 더 해줄까 귀를 쫑긋 세우고, 집에 돌아오면 또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기타를 치며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니 현실이 보였다.


유튜브의 고수들은 코드 하나를 잡는 데 손가락이 안 꼬이는데 나는 여전히 줄 사이에 손톱이 걸린다. 그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편하게 이동하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 거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혼자 중얼거리며 웃었지만, 마음 한편엔 의기소침이 살짝 스쳤다.


그렇게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을 보내고,

목요일이 되어도 여전히 기타는 그대로였다.


대신 귀는 바빴다.


출퇴근길에 이어폰을 꽂고 배웠던 노래와 배우고 싶은 노래를 계속 들었다.


이상하게 들을수록 손가락이 기억나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G, 거기서 Am 아, 이건 D7이네.'

코드도 잡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손이 움직였다.


연습을 하지 않아도 몸속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리듬이 흐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손끝에서, 그리고 입술에서 흥얼거리듯 말이다.


라디오에서 기타 반주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공중에서 스트로크 하는 시늉을 했다.


'당장 칠 기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리듬은 남아 있네.'

그 생각이 스치자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처음에 선생님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빨리 치려고 하지 마세요. 코드를 제대로 잡는 습관부터 들이세요. F처럼 어려운 코드는 약식으로 가도 괜찮아요. 편해야 오래갑니다."


그때는 그냥 듣고 넘겼는데, 이제야 알겠다. 나는 음악을 즐기기보다 기타를 이겨보려 했던 것 같다. 기타는 악기인데, 어느새 경쟁상대가 되어 있었다.


A, Am, A7, Bm, B7, C, C7, D, Dm, D7, E, Em, E7, F, G, G7, 그리고 카포.


기본 코드만 해도 세어보니 이만큼이다. 이걸로 칠 수 있는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괜히 조급해했구나 싶었다.


그날 밤, 다시 기타를 꺼냈다.

악보는 펴지 않았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코드를 잡고, 줄을 튕겼다.

소리가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게 참 좋았다.


조급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걸 놓치고 있었다.

늦게 배우면 속도가 더딘 건 당연한데 괜히 심술을 부렸던 것 같다. 며칠을 쉬고 나서야 알았다.


"멈춰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번 주의 연습은 '연습하지 않는 연습'이었다. 그게 나에겐 꼭 필요한 쉼표였다.


조용히 기타를 무릎 위에 올렸다. 피크를 쥔 손끝이 조금 낯설었지만 그 어색함이 오히려 반가웠다. 이제는 코드보다, 리듬보다 그냥 음악을 그리고 소리를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했다.

내일은 또 어떤 노래를 기억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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